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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하 Jan 14. 2022

세 번째 화실 이야기

지금까지 그림을 배우러 다닌 것은 두 번이었다. 


그 처음은 20대 초보 직장인이던 때, 한창 본인이 만든 홈페이지에 그림일기 쓰기에 재미를 붙이고 있던 (그러고 보면 시대를 앞서갔으나 꾸준히 하지 못하여 ‘한 때’의 추억이 된 일이 우리 인생사엔 많다) 건축 일하던 친구가 스케치 연습이 필요하다며 함께 그림을 배우러 가자고 제안했고, 당시 뭐든 배우는 걸 좋아하던 나는 흔쾌히 친구의 초대에 응했다. 친구가 찾아낸 화실은 신촌에 있는 작은 화실이었는데 주말에 한번, 두 시간 정도 우리 둘 밖에 없는 수업시간에 선생님은 자유 분망 한 영혼의 예술가 분위기를 풍기며 별로 아무것도 가르치려 하지 않는 분이었다. 요즘 같았으면 성인을 위한 다양한 커리큘럼으로 흥미를 끄는 수업을 하셨을 테지만 그때만 해도 그림 수업은 선긋기부터 하던 때라 한 달 동안 알 수 없는 무수한 선을 긋고, 그 선으로 벽돌 하나랑 휴지 하나를 그렸다. 그리곤 이내 심드렁해져서 이래저래 주말이 바쁘다는 핑계로 주말 화실 생활을 접었다. 그럼에도 화가가 될 것도 아니면서 처음 내 돈 내고 등록해서 화실에 다니는 사람이 되었던 벽돌 그리던 그 짧은 한 달은 친구와의 추억 소환 단골 장면이다.


두 번 째는 스페인에서였다. 스페인 살이가 어느 정도 익숙해졌을 때 언어 학원 말고 다른 배울 거리를 찾던 중 동네문화센터 개강 전단지를 뒤늦게 봤고, 그중 마감이 안 된 수업 몇 개 중에 그나마 관심 있는 것이 ‘그림’ 반이었다. 딱히 그림을 배워야겠다는 생각보다는 그림을 배우며 스페인어를 더 익혀보자는 다소 불순한 의도를 가진 시작이긴 했다. 

수업이 시작되는 날 준비물이 뭔지도 모르고 주뼛거리며 동네 문화센터 교실에 들어섰는데 나이 지긋하진 할머니 할아버지로 가득한 교실에 놀랐다. 이미 여러 해 같은 수업을 듣고 계시는 듯 서로에게 익숙한 분들에게 낯선 외국인의 등장도 놀라웠을 터, 그렇게 서로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스페인어는 제대로 할까, 어느 나라 사람인가? 걱정 반, 호기심 반으로 서로 눈치를 살피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선생님인 듯 보이는 여성분이 다가왔다. 등록 리스트를 보며 스페인 이름이 아닌 듯 한 내 이름을 찾아내어 어렵게 발음을 하며 내가 맞는지 물었다.

준비물이 하나도 없는 나에게 수업을 위한 기본 준비물을 적어주시는데 한분 두 분 자신의 종이며 목탄이며 첫 시간에 필요한 재료들을 서로서로 나눠주셨다. 다음 시간부터 사 오라며 근처 화방의 지도까지 꼼꼼하게 적어주셨다.

그렇게 모두에게 어색하게 시작된 만남은 1년이라는 시간을 쌓이면서 자연스럽고 익숙해졌고 나는 그림 수업에서 제일 어리고 어설픈, 보호대상에서 매 시간 작품 하나씩을 완성해 내는 스피드 여왕으로 거듭났다. 그림 수업에서 작품이 아닌 스피드로 인정을 받는 것이 자랑할 일은 아니지만 뭐든 잘하는 게 있으니 그나마 평등해지는 기분이었달까. 그냥 그랬다.

 예술학교에서 도자기를 배우기 시작하면서는 문화센터 수업과는 시간이 맞지 않아 선생님이 개인적으로 운영하는 화실에 한 동안 다녔는데, 수업 같이 들으시던 분들이 대부분 화실 수업도 듣고 계셔서 꽤 오랜 시간을 함께 그림을 그렸다.


얼마 전, 독립을 하게 되면서 스페인에서 보낸 짐 중 지인의 집에서 찾아오지 않은 것들을 챙겨 오며 까맣게 잊고 있었던 그 짐 속에 넣어 둔 나의 그림들을 발견했다. 이런 그림을 그리던 때가 있었구나. 도자기를 위한 간단한 스케치를 하는 것도 어색한데 A3 정도의 도화지를 가득 채운 그림들을 보니 새삼 다시 그림을 그리는 시간이 일상에 만들어 놓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새해에 다시 그림을 그리러 다닌다. 나의 세 번째 화실 나들이인 셈이다. 지인의 소개로 정한 한 작가님의 화실은 공방에서도 멀지 않아 날이 좋아지면 자전거로도 다닐 수 있는 거리이다. 첫 시간, 이미 그 공간에 익숙한 다른 그림 동료들 틈에서 세상 조용하게 두 시간을 동그라니 종이 한 장에 기대어 보냈다. 수채화 색을 만들어 보고, 펜으로 간단한 모작을 해보는 시간 안에 담겨있는 어색하고 낯선 나를 오랜만에 만났다. 그것이 싫지 않았다. 


첫 수업을 마치고 화실을 나서며 돌아오는 길, 스페인에서 첫 그림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며 괜히 쑥스럽고 낯간지러워 웃음이 나던 것처럼 그렇게 근질근질, 실실 웃음이 났다. 그렇게 약간 설레었던 것 같다.


올봄에는 따릉이 타고 도림천변을 지나 화구를 들고 화실에 가야지.

세 번째 화실 스토리가 어떻게 이어질지 모르지만 두 번으로 끝나지 않고 세 번이 된 이 이야기가 참 다행이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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