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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이력서 앞에서 '호명사회'를 찾다

퇴사하는 순간 오롯이 남은 것은 단지, 내 이름 두자뿐!

by 오늘

친구가 전달해 준 채용공고는 국내 IT업계의 5대장을 지칭하는 '네쿠카라배' 중 한 곳의 브랜드 카테고리 세일즈 포지션이었다. 당장 재취업할 생각은 없었지만, 굳이 안 쓸 이유가 없었다. 대한민국 IT업계에서 손에 꼽히는 회사인데!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중간에 전략지원 업무로 전향하긴 했지만 내 커리어의 지분을 나누자면 카테고리 매니징, 상품 소싱, 브랜드 관리를 하는 MD업무가 8할이니 못할 것도 없었다.


게다가 친구가 추천하며 말해준 회사의 장점이 너무나 유토피아적이어서 더더욱 지원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업무강도는 높지만, 똑똑한 사람들과 함께 일한다는 소속감이 들고 사람을 부품처럼 대하는 분위기가 아니라고 했다. 게다가 업무진행할 때 성과는 중요하지만 성공하면 성공한 대로, 실패하면 실패한 대로 의미를 찾으려는 분위기라니. 결과만큼 과정도 중요하게 생각하는 나에게는 정말 유토피아가 따로 없었다.


마지막 이력서를 제출한 건 약 8년 전, 면접은 약 4년 전 승진시험을 볼 때가 마지막이었다. 이력서 업데이트를 위해 다시 꺼내 본 이력서는 어설프기 짝이 없었다. -이런 이력서와 경력기술서를 보고도 뽑아준 전 회사에 잠시 감사인사를 전하며...-


예전 이력서 양식에서는 사진이 필수인 데다가, 주소에 결혼여부. 심하면 키/몸무게/시력도 쓰는 곳이 있었는데 요즘은 사진영역은 아예 없고 경력과 성과 중심의 포트폴리오가 나를 증명하는 시대였다. 세월은 내 눈가에 주름만 새긴 것이 아니었다. 내가 한 조직에서 오래 있었던 세월만큼 흐르고 흘러 내가 모르는 틈을 만든 것 같았다. 그 당시 이력서의 자기소개는 그저 면접용 예상 질문지 같은 것이었는데, 지금은 그렇고 그런 이력들 사이 눈에 띌 수 있는 엣지포인트 같은 느낌이랄까. 심지어 이력서만으로는 부족해서 화려한 구성의 포트폴리오라니! 우리 때는-기성세대 단골멘트이지만...- 포트폴리오는 디자이너, 테크 직군에만 첨부했던 거 같은데... 격세지감이라는 사자성어가 절로 떠올랐다.


문득 송길영 작가의 '시대예보:호명사회'라는 책 소개가 생각난다. 무섭도록 빠르게 발전하고 변화하는 기술시대에는 회사의 간판이나 직함이 보장해 주던 것들이 사라지고 '나보다 내 직업이 먼저 죽는 시대가 온다'는. 그래서 명함 속 직책이나 직함, 주어진 역할 말고 서로 'OO님'이라고 불리는 '호명사회'가 온다는 것. 정작 OO과장님, OO팀장님이라고 칭하다가 몇 년 전부터는 아예 직급 상관없이 OO님이라고 불리는 조직에 속해 있었으면서도 느끼지 못했었는데, -팀장님한테 OO님이라고 부르기 위해 얼마나 큰 용기를 냈던가-속한 조직의 네임밸류나 직책이 아니라 나 자체로 증명하고 인정받아야 하는 사회가 오고 있음을 이력서를 쓰면서 절감하게 되었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라는 영화 제목처럼, 회사 명함에 큰 무게를 느꼈던 과거의 나를 한번 더 깨고 나올 시점이었다.


막상 이력서를 쓰다 보니 십 수년의 조직생활에서 내가 별로 대단한 일을 한 것 같지 않았다. 매일매일을 열심히 최선을 다해 살았는데, 래퍼들이 경쟁하는 서바이벌 프로그램은 합격목걸이라도 손에 쥐어주지 나의 지난 14년은 내가 알아서 증명해야 하는 현실이라니. 조금 허탈한 느낌이 들었다. 그 당시에는 상당한 성과였더라도, 세월이 지나 트렌드가 지나고 나면 그리 대단하지는 않았던 같기도 하고. 특히나 이커머스는 성장이 굉장히 빠르기도 했고 COVID-19 팬데믹 시기를 지나면서 급격히 변화한 라이프스타일과 가장 밀접한 영역이었기 때문에 고작 2~3년 전의 일들도 굉장히 오래된 얘기 같은 경향이 있다. 지나고 보니 별 것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역시, 회사에서의 성과는 회사의 것이지 온전히 내 것은 아니구나. 회의감도 들었다.


이제 커머스 기업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온라인 셀러가 될 수 있는 시대이니, 회사에서 시스템을 구축하고 소싱하고, 운영해 온 것들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인 것 같기도 했다.


'호명사회'를 맞아 차 떼고, 포떼고 나 자체로 인정받고 소개할 수 있는 키워드가 뭘까. 무수한 고민 끝에 채워 넣은 이력서를 제출하고도 고민은 여전히 남았다. 다음 회사를 간다면 그 부분을 유념하면서 야무지게 일해야지.


그러나, '다음 회사를 간다면'의 '다음 회사'의 기회는 아쉽게도 이 회사가 가지고 가지 못했다는 슬픈 결말을 전합니다. 하지만 운 좋게 최종면접까지 보게 되면서 나를 좀 더 들여다보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음은 예기치 못한 성과였다. 그리고 이제 내 이름만 남은 나를 어떻게 포장하고 드러내야 할지 고민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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