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을 갈아 넣었던 나의 이력서 첫 줄이여
희망퇴직을 하고 약 보름정도 지났을 때, 언론에서는 나의 첫 회사인 소셜커머스사가 연루된 약 1조 4천억 원대의 대규모 대금지급 불가 사건이 보도되었다. 한때는 인기 최정상의 남자배우를 TVC모델로 쓰기도 하고, 온라인 커머스의 M/S의 상당 부분을 차지했던. 이커머스의 혁신을 주도했던 스타트업 기반의 소셜커머스였다.
혁신, 그 얼마나 영광스럽고 덧없는 단어인지. 많은 기업의 매년 작성되는 전략에 예외 없이 들어가는 핵심 키워드이며 현재의 안정을 깨는 긴장을 주는 단어. 하지만 혁신 역시 찰나의 것이고, 계속해서 그 안정을 깨고 새로워지지 않으면 그저 과거의 영광일 뿐인 것을.
내가 자발적 퇴직자가 되었을 무렵, 나의 첫 회사는 마지막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듯했다.
아직 남아있던 동료들은 죄인이 되었다. 본인을 믿고 상품을 공급했던 협력사에, 플랫폼을 믿고 주문했던 고객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잘하고 싶어서 열심히 했던 마음들은 구겨지고 무너져서 돌아왔다. 떠난 지 오래된 나에게는 그저 애틋한 X-회사에 대한 감상이 전부였지만 오롯이 현실로 겪어내고 있는 여러 사람들에게는 악몽 그 자체였다. 옛 동료들, 협력사, 고객, 제휴사까지... 모두에게 상처인 사건이 연일 뉴스를 도배했다.
나는 나의 첫 회사를 사랑했었다.
비록 본질적으로는 돈을 받고 노동력을 제공하는 딱딱하기 그지없는 비즈니스 관계이지만, 나는 회사에 나를 투영했다. 20대 중반의 사회초년생인 내가 열심히 하면 그때 고작 만들어진 지 2년 차 정도였던 회사도 잘되는 게 보였다. 매일 자정 새롭게 띄울 상품을 찾고, 행사가와 재고수량을 협의하고, 실시간으로 새로고침 하면 바뀌는 어드민의 매출지표를 보며 행복했다. 한참 지나 그때를 돌아보는 이커머스 고인물들은 우스갯소리로 그때는 돌멩이를 올려도 팔리는 때라고 했지만, 사실은 밤새 새로고침 하던 열정들이 늦게까지 서울의 등대를 자청했기 때문에 있었던 성장의 시대였다. 사랑해서 헤어진다는 진부한 이별대사처럼, 나는 그런 회사가 정체되고 처음의 모습을 잃어가는 모습에서 더 미워지기 전에 떠났다. 떠날 무렵 그 회사는 이제 나만 열심히 해서 될 것도 아니었고, 나의 모습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으니까.
회사는 나였고, 내가 회사였다. 내 돈 들여 세운 회사도 아니고, 기업가치가 오른다고 내 연봉이 비례해서 오르는 것도 아닌데도 그랬다. 아마 그게 나를 소모하는 업무스타일을 만든 시작이었을 것이다.
어쨌든 팩트는, 나는 백수가 되었고 나의 이력서의 첫 줄을 장식할 첫 회사는 퇴로를 걷고 있었다.-왜 하필 이 시기에!- 나는 이 길을 계속 가야 할까? 내가 사랑했던 이커머스, 나의 젊음을 갈아 넣어 같이 성장했던 시절. 어떤 회사를 가더라도 같은 일을 반복할 듯한 느낌이 들어서 고민스러웠다. 다시 이커머스 시장에서 재취업을 한다면 나의 경력과 경험을 토대로 할 수 있는 새로운 일이 없을까 싶었다. 하지만 이커머스 시장은 안정기에 들어 성장세가 둔화되고, 국내 시장점유율은 특정 2개 플랫폼 정도가 50% 이상을 점령한 상태. 고민이 많아서 고민하고 싶지 않았다. 당분간은 일에 대한 고민에서 떨어져 있자.
그러던 중,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언니, 재취업 생각 없어? 우리 회사 경력채용하길래.
언니 지원할 거면 내가 인재추천 해 볼 수 있을 거 같은데!"
인생이란 정말 알 수가 없지, 스스로 거리 두기를 하니 예상치 못하게 찾아온 기회라니.
당장 취업할 생각은 없었지만 지원하지 않을 이유도 없었다.
애증의 이커머스 노동자 타이틀은 과연 이어질 수 있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