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가 과로사한다더니, 제 얘긴가요?
먼 훗날 어느 시점에 돌아보면 나의 커리어에 변곡점이 될 2024년 7월.
여느 여름보다도 무덥고 습했던 때에, 나는 과거의 내가 가장 두려워하던 백수가 되었다. 당분간은 내밀 명함 한 장 없겠지만 앞으로 남은 인생에 언제고 다시 일은 하게 될 텐데 한 살이라도 젊을 때 그동안 스스로 혹사시킨 나에게 잠시 쉬는 시간은 줘도 되지 않을까.
그렇게 두려웠던 백수 시작인데,
생각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나에게는 다행히, 서운하지만 회사에도.
퇴직처리가 완료되고 백수 1개월 차는 매우 바빴다.
우선 앞으로 약 반년동안 경제적으로 나의 최소한의 자존감을 지켜줄 실업급여 신청을 하고,
직장에 다닐 때는 꿈도 못 꾸었던 필라테스 아침 클래스를 신청했다.
그리고 삼십 대 후반이 되도록 미뤄두었던 운전을 배우기 시작했다.
나이를 먹을수록 여유보다 두려움이 느는 속도가 더 빨랐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무서운 부분이 더 많이 보여서 시도하지 못했던 운전. 사실 운전의 안 좋은 사례는 뉴스고, 예능이고, SNS고 많고 많이 접했지만 좋은 사례는 그 옛날 '일요일일요일밤에'의 '이경규의 양심냉장고'가 전부 아닌가?
그래도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늦은 법이니,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었다. 한문철 씨 보다 이경규 씨에게 기대 보기로 하고 용기 내어 연수를 신청했다.
그리고 약 8개월 전부터 배우기 시작한 문인화로 미술대전에 접수하기로 했다.
처음 문인화 화실에 등록했을 때를 기억한다.
당시 나의 소속은 이커머스 기업의 영업전략 부서였기 때문에 팀원분들과 전략발표 초안을 잡고 키워드를 잡아내고, 각 부서와 커뮤니케이션해서 몇 날이고 PPT를 잡고 엑셀을 돌리고 있었다. 이제 와서 말이지만, 손으로는 바쁘게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지만 사실 속으로는 상상글짓기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쓴 대로만 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시장에는 변수가 너무 많았으니까.
게다가 명절이 다가오고 있었다. 내가 몸담은 회사는 오프라인 기반의 이커머스 회사였기 때문에 전통적인 명절의 의미가 보통의 이커머스보다 상당한 편이었다. 하지만 시장은 변하고 있었고, 이커머스의 주요 타깃 연령에서 명절의 의미는 그저 '긴 연휴'가 된 지 오래였다. 직접 방문해서 전달하는 핸드캐리 상품보다는 '선물하기' 기능으로 간편하게 전달하는 것이 트렌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사의 큰 행사기 때문에 수차례 전략을 수정하고, 매출을 분석하면서 부진한 부분은 보완했다.
이 모든 것이 내가 했지만,
온전히 나의 성과가 될 수 없는 일.
해야 하기 때문에 해야 하는 일이었고,
그래서 그 당시의 나는 굉장히 지쳐있었다.
만약 그때 좀 더 주체적으로 나섰다면, 아님 오히려 생각 없이 쳇바퀴 굴리듯 했다면 좀 달랐을까?
어쨌든, 나의 화실 등록 시기는 그랬다. 물미역처럼 늘어진 몸으로 남편의 차에 실려 동네 마트에 장 보러 갔다가 차창밖에 화실 간판에 충동적으로 검색해 등록했다.
해야 해서 하는 일 말고 하고 싶어 하는 일 하나쯤 갖고 싶었달까.
그리고 약 8개월, 하고 싶어 하는 일에서도 성취를 얻기 위해 미술대전에 등록했다. -으, 그놈의 성취!-
이제야 말이지만 어렸을 때 나는 글 쓰고 그림 그리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이제라도 꿈을 이루는 거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설레었다.
한 달을 내내 일어나서 붓을 잡고 밥 먹고 선을 긋고 자기 전에 또 그렸다.
선이 잘 안 그어지면 여러 번 긋고, 붓끝이 갈라지면 몇 번이고 물에 담가 길을 잡고, 물 번짐이 심하면 다음번엔 좀 더 물을 덜 먹이면 될 일.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여러 번 쌓아온 연습시간이 내 안 어딘가에 쌓이겠지 하는 마음으로 수험생처럼 그리고 또 그렸다.
예전에는 해야 하는 일에 쏟던 에너지를 하고 싶은 일에 쏟으니 마음에 불꽃이 튀는 느낌이었다.
이제와 고백하건대, 나는 직장생활을 할 때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사람이었다. 사람들은 돈 받는 만큼만 하면 되지 왜 이렇게 스트레스를 받냐고 했지만 나는 그게 안 됐다. 찬찬히 그 마음을 거슬러 올라가 보니 스트레스의 뿌리는 '잘하고 싶은 마음'이었던 거 같다. 잘하고 싶었다, 잘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근데 그 마음이 잘못된 건 아니지 않나? 잘하고싶은 마음은 간절함으로 이어지고, 간절한 마음은 스스로를 괴롭히기 마련이다. 단지 그 마음을 잘 다스렸으면 됐을 텐데, 나는 그 마음에 잠식되어서 스스로를 너무 소모했다.
백수 1개월 차, 드디어 잘하고 싶어 달려 나가는 마음을 다스리는 법을 깨닫게 되다.
... 그런데 백수가 과로사한다고, 나 여전히 너무 열심히 살고 있는 거 같은데...?
ps.
그리고 대회결과는...?
최우수상보다 값진 입선. 회사 밖에도 성취는 있었다.
으, 그놈의 성취! 달다 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