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의 미션, 마음의 코어단련.
"회사가 전쟁터라고? 밖은 지옥이다."
-미생-
직장인들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해보거나, 들어본 대사일 것이다.
회사 밖은 지옥이라고, 회사에서는 젖은 낙엽처럼 붙어 있는 것이 현명한 거라고.
근데 젖은 낙엽은 불이 붙을 수 없잖아요?
모두가 한 번은 화르륵 불타올라 반짝여 보는 것을 꿈꾸면서도 으레 그렇게 말했다. 나도 희망퇴직 전까지는 당연히 그렇게 생각했다. 안정감만큼 리스크는 적으면서 만족감이 큰 건 없으니까. 그리고 그 안정감을 지키기 위해서는 충분한 노력과 성취가 필요했기 때문에 그 과정 자체로도 자아실현이 됐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스스로 선택한 지옥과 마지못해 남아있는 천국이라면,
선택을 고민할 정도의 밸런스는 되지 않을까?
실업급여를 받는 동안은 운이 좋아 재취업의 기회가 오면 굳이 외면하지 않겠으나, 그 자체를 목적으로 두지는 않으려고 다짐했다. 이른 퇴직을 한 백수면서도 재취업을 1순위로 두지 않는 이유는 이랬다.
첫 번째, 급하다고 아무거나 먹으면 탈 난다.
시장상황은 좋지 못했다. 여러 굵직한 이커머스 플랫폼들에서 잇따라 희망퇴직과 권고사직이 시행되었고, 설상가상 내가 퇴사한 달에 내 첫회사였던 소셜커머스 회사는 사상최악의 판매대금 정산불능으로 뉴스에 언급되고 있었다. 온라인 성장세는 점차 둔화되고 있었고 매년 마케팅전략으로 언급하던 "고객의 로열티 강화"는 점차 어려워지고 있었다. 이커머스 신뢰도의 문제, 그리고 수많은 쇼핑경험으로 다져진 스마트한 고객들. 경쟁은 강화되고 사람을 대체할 수 있는 시스템은 고도화되었다. 비용을 절감하려면 인건비만한 것이 없었고 그렇게 이커머스 시장의 인력 공급과 수요는 불균형을 이뤘다. 우스갯소리로 발에 차이는 게 이력서라고, 회사 밖은 춥다고들 말했다. 틀린 말은 하나도 없었다.
더구나 시장상황이 이러하니 당장 가고 싶은 회사가 떠오르지 않았다. '신과 함께'라는 영화를 보면 7가지 지옥의 종류가 나오는데 지금 이 시장의 상황이 딱 그것 같았다. 그냥 종류가 다른 7가지의 지옥. 나태지옥에서 도망쳐 갔더니 한방지옥이고, 한방지옥에서 도망쳤더니 도산지옥이고. 결국 근본은 지옥이고 종류만 이것저것 다른. 그렇다면 이 혼란한 지옥에서 잠깐 벗어나서 구천을 떠돌아도 괜찮지 않을까? 어차피 언젠가 돌아갈 지옥이라면.
어릴 때 엄마가 말했지, 추운 데서 급하게 먹으면 체한다고. 다행히 나에게는 급하게 아무 데나 이력서를 내지 않아도 굶지는 않을 위로금과 퇴직금, 그리고 실업급여가 있었다.
두 번째, 나의 콤플렉스, Mrs. 아등바등. 그걸 탈피하고 싶었다.
아무도 쫓아오는 사람이 없는데 정신없게 달리고만 살았다. 사람들은 적당히 내려놓고 일하지 뭘 그렇게까지 해서 스트레스를 받냐고 했지만 그럴 때마다 인생이 청기백기도 아니고 올려, 내려를 어떻게 마음대로 조절하나 답답했다. 그러면서도 뭐든지 열심히 한다는 말을 들으면 왜인지 모르게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열심히 한 주제에 열심히 한 티는 나고 싶지 않았다. 멋이 없어 보인달까. 다행히 이제라도 큰 용기를 내어서 드디어 커리어의 청기백기 게임에서 '내려'타임을 잡았는데, 사람들이 그토록 말하던 내려놓는다는 걸 어떻게 하는 건지 좀 알고 싶었다.
근본적으로 스스로를 인정하고, 내가 누군지를 알아야 다음에 어떤 일을 하든 여유 있고 즐기면서 할 수 있을 거 같았다. 그러려면 역시, 마음의 코어가 단단해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엄한 곳의 근육을 대신 끌어다 써서 탈이 나기 마련이니까.
그렇게 희망퇴직 후 백수로서의 첫 미션은 명확해졌다.
"마음의 코어(Core)를 단련할 것."
이 무슨 질풍노도의 시기의 일기장 첫 소절인가 싶겠지만, 나름 불혹의 나이를 얼마 남기지 않은 나에게는 아주 중요한 과제였다. 불혹, 세상 일에 정신을 빼앗겨 판단을 흐리는 일이 없는 나이. 밖에서 아무리 나를 후려치고, 현혹해도 허튼 근육을 쓰지 않고 단단하게 중심을 잡아 버틸 수 있는 마음의 코어.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내가 뭘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하나하나 척추를 분절하듯 잘게 쪼개어 들여다보면서, 긴장으로 수축되었던 마음의 근육들을 이완시키고 균형을 맞춰가면서 코어를 단련해야 한다.
그래서 젖은 낙엽처럼 살지 않고 물기를 바싹 말려 잘 타는 마른 장작이 되는 것이 목표인 것으로.
언젠가 불씨를 만나면 활활 잘 탈 수 있도록!
백수미션 접수완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