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온도>무심코 붙인 점 하나에 식기도, 데기도

이기주 <언어의 온도>

by 오늘

가끔 익숙한 단어에도 낯선 느낌이 들곤 한다.


이 상황에 꺼내어도 될지 망설여지는 순간이 있는 것이다. 그럴 때면 단어의 뜻을 검색해보곤 한다. 재밌는 것은, 그 단어의 길게 늘어뜨린 의미들을 알고 나면 더욱 낯설게 느껴질 때가 있다는 것이다. 오랫동안 알아왔던 말임에도 그렇다.


그래서 더욱 고르고 골라야 한다. 같은 단어라도 상황에 따라 그 끝에 닿는 마음에 서리처럼 내려앉기도 하고, 갓 지은 밥냄새처럼 포근하고 달큰하기도 하니 말이다. 심지어 쉼표가 어디에 자리 잡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완전히 달라지기도 하니, 이토록 만지기는 쉬우나 다루기는 까다로운 게 또 있을까?


이런 내 생각과 같은 책을 만났다.

이기주 작가의 <언어의 온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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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말과 언어, 그리고 그 안에 담긴 온도에 대한 이야기를 짧은 에세이로 담고 있다. 단어의 무게, 말의 온기, 문장의 결 속에 숨어 있는 진심들. 페이지를 넘길수록 ‘말’이라는 소재가 얼마나 섬세하고도 조심스러운 존재인지 새삼 깨닫게 된다.


책의 표지를 열면 서문보다 앞서 반겨주는 문장이 있다.


말과 글은
머리에만 남겨지는 게 아닙니다.
가슴에도 새겨집니다.

마음 깊숙이 꽂힌 언어는
지지 않는 꽃입니다.

우린 그 꽃을 바라보며
위안을 얻기도 합니다.

생각해 보니, 언젠가 애써 꾹 눌러 참고 있는 눈물을 터트렸던 것은 누군가 어서 울어버리라고 옆구리를 찔러댔던 것 때문이 아니라 예상외로 "괜찮아?"라는 걱정스러운 한 마디였던 것 같다. 별 말이 아닌데도 필요한 상황에 듣고 싶던 말, 그러니까 말 그대로 적재적소의 한 마디를 들으면 그게 평생 안 잊힌다.


반대로 평생 가슴에 멍으로 남는 말도 있다. 생각도 의도도 없었겠으나 비수처럼 날아와 상흔을 남기는 그런 말들. 곱씹을수록 쓴 맛이 배어 나와 뱉어내고 싶은데 이미 다 삼켜버려서 평생 떠올릴 때마다 쓴 물을 올리게 하는 그런 것들 말이다. 무게가 없는 말의 존재감은 이렇듯 어마어마하다.


어떤 말은 떠올릴 때마다 마음이 데도록 따뜻하기도 하고,

어떤 말은 피가 식을 듯 차가워지게도 한다.


말의 온도는 그 사람의 마음이 머무는 기류를 따라간다.




작고 사소한 언어의 조각들이 의외로 커다란 감정을 건드린다.

관련해서 재미있는 문단을 발견했다.

조사 하나를 잘못 선택해서 상황이 애매해지는 경우에 대한 에피소드다.


"넌 정말이지 외모도 예뻐!"라는 칭찬을 "외모만 예뻐!"라고 말해버리면 친구 간에 의만 상한다는.

한 글자짜리 조사 가지고 문장의 의미를 바꿔버릴 수 있는 것은 한글의 묘미이다. 그 많은 단어들 사이 자리 잡은 하나의 글씨 때문에 머리를 갸웃거리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는 언어.


실제로 남편과 연애할 때 비슷한 에피소드가 있어서 이 장은 개인적으로 재미있게 읽었다.


연애시절 친구와 등산을 다녀오면서 그 당시 남자친구였던 남편과 통화하는 중

"나는 등산복이 안 어울리는 거 같아"라고 한 내 말에

"응, 자기는 원피스만 잘 어울리는 거 같아"라고 대답한 남편 때문에 마음이 상했던 적이 있다.

그 한 마디가 내 머릿속에 얼마나 많은 해석을 일으켰는지.


아니, 그럼 이 남자.

내가 바지를 입었던 날은 꽝이라고 생각했던 건가? 본인도 썩 그렇게 옷빨이 좋은 건 아니거든?

나는 항상 자기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나름 꾸민 건데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단 건가!


나중에서야 '원피스가 잘 어울리는 거 같아'라는 말을 하려다 조사를 잘 못 선택했다고 (석연치 않은) 해명을 듣긴 했지만 이 에피소드는 여러모로 기억에 남아 있다. 정말이지, 여러모로.


말이란, 단어 하나, 조사 하나에도 마음을 요동치게 만드는 힘을 가진 것이다.




<언어의 온도>의 곳곳에서는 단어의 어원에 대한 이야기들이 많이 자리 잡고 있다.

"프로"와 "아마추어"의 경계를 알기 위해,

감정의 생동성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영어로 감정은 이모션 emotion이다. 이모션의 어원은 라틴어 모베레 movere인데 '움직인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감정은 멈춰있는 것이 아니라 자리를 바꿔가며 매 순간 분주히 움직이는 거라고.


그래서 내 감정이 시시때때로 다른 얼굴을 하고 있는 거구나. 그리 분주히 움직이는 탓에 내가 가끔은 놓쳐버리고 길을 잃은 듯한 황망함에 빠지기도 하는구나 납득이 됐다.


어원을 찾아본다는 것은 이렇듯 내가 이해하지 못했던 나, 또는 나의 감정, 상태에 대해 돌아보게 한다. 얽힌 실타래를 풀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그 시작점을 찾는 것인 것처럼 혼란스러울 땐 그 뿌리를 찾아보면 도움이 된다.


그리고 책의 거의 끝자락쯤 갔을 때 요즘 스스로 고민하고 있는 질문에 대한 답을 얻은 것 같은 문장을 발견했다. 우리는 사실 어떤 일에 실패했다는 사실보다, 무언가 시도하지 않았거나 스스로 솔직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더 무력감에 빠지곤 한다는. 우선 하고 보는 것, 그게 없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으면서 책장을 덮었다.


마치 2017년에 매혹적인 보랏빛 책표지에 반해서 구매해 놓고는 이제까지 펼쳐보지 못한 이 책을 오늘에서야 다 읽어버린 것처럼.


우선 표지를 펼쳐서 읽기 시작하면 되는 일인데, 항상 그게 어렵다.





예전에 경력직으로 입사한 회사에서 진행하던 프로젝트가 무산되면서 이직할 때 보장받았던 직무가 없어져 자주 부서이동을 했던 시기가 있었다. 이직 당시 나름 커리어에 자신도 있고, 내 업무능력에 대해 자부심이 있던 시기였는데 회사의 사정으로 시작도 못해본 프로젝트가 엎어진 바람에 여러 팀을 전전하며 불안하고 자존감이 낮아지기 시작했다.


사람이 자존감의 밀도가 낮아지면 귀와 눈이 예민해진다는 걸 그때 깨달았다.


다른 이들이 나에 대해 어떻게 평가할까 불안하고 두려워서 나도 모르게 모든 감각이 시퍼렇게 날이 서 있었다. 상대방의 말이 의도가 없는 걸 알면서도 단어의 배치와 쉼표의 위치, 말줄임표가 담고 있는 함축적 의미까지 분석하고 상상해서 스스로 상처를 떠안기 바빴다.


어떤 팀장님은 "팀 실적이 좋지 않은 상황에 추가 인력을 받는다는 게 부담이긴 합니다."라고,

어떤 팀장님은 "앞으로 열심히 잘해봐요! 물론 우리 팀엔 열심히 하지 않아도 눈에 띄는 사람들이 많지만"이라고 했다.


첫 번째 말은 사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력이 왔으니 기대가 큽니다'라는 뜻이었을 수도 있고, 두 번째 말은 '당신도 그럴 거라고 믿어요'라는 격려의 의미였을 수도 있지만 당시의 나에게는 둘 다 '너를 증명하지 못하면 곤란할 거야'라는 경고처럼 들렸다. 말이라는 것은 하는 사람 못지않게 받는 사람의 상황도 만만치 않은 영향을 준다는 걸 조금 지나서야 알게 되었다.


그렇게 내가 마구 헤쳐놓고 해석해 댄 말들로 스스로 상처를 받던 와중에 전 직장에서 함께 일했던 경험이 있던 이직한 회사의 동료가 회사 엘리베이터 앞에서 다른 팀 동료에게 내 소개를 해 준 적이 있다.


"이 분 되게 잘하는 사람인데 이번에 상품본부로 발령받았어요!"


과장 되게 나를 자랑하며 소개해주는 한 마디,


그리고 그 과장된 소개에 이어 밝은 목소리로 인사해 주면서

"잘 오셨어요! 잘 부탁드려요"라고 명랑하게 대답하던 상대방의 한 마디.


되게 별 게 아닌데, 막상 이제와 얘기해 보면 그 두 사람은 기억도 못하는 장면인데 내 머릿속에는 그날의 엘리베이터 앞을 떠올리면 자동으로 선명하게 재생된다. 그 밝은 목소리와 따뜻한 마음들이.


이렇게나 말 한마디가 또 하루를 살 힘을 보태준다.

언어, 마음을 데게도 식게도 하는 요상한 온도를 가진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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