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얘들아, 누구니?"

호도과자는 따뜻할 때 먹어야 해

by 토닥토닥 oz

영자 씨,

이병헌 님이 나오는 드라마를 보다가 첫 사위 감으로 딱이라며 저런 'ㄴㅗㅁ'을 만나야 한다고 꿈에 부풀어하셨던 말. 눈매가 서글하고 눈빛이 선하다고 그리 좋아하셨잖아.

기분 좋은 사람이라고... 마치 아는 사람처럼. 훗~


그 이후로 새로운 드라마를 볼 때마다 당신 맘에 쏙 드는 한 사람씩을 더해가셨어.

난 그래도 처음 들은 이름이라 그런지 이병헌 님이 가장 기억에 남네.

첫 맞선이라도 본 사람인 듯... '풋' 웃어본다. 혼자서...




21살쯤이었을까? 그때부터 영자 씨는 본격적으로 탐문을 시작하셨어.
내가 누구를 만나는지...
영자 씨 나름의 ‘결혼 프로젝트’였을지도? 본인은 끝까지 아니라고 했지만.

영자 씨는 늘 내가 궁금했고, 나는 그런 영자 씨를 늘 피해 다니고...


끝끝내 엄마는 내 친구들, 요즘말로 '남사친'인 그들을 제대로 만나볼 기회가 거의 없었어.

그냥 자꾸 결혼하고 연결하니까 부담스러웠어. 아니 그럴까 봐 부담스러웠다고 해야겠지.

여전히 낡은 원피스를 계속 입고 있는 영자 씨가 창피하기도 했고...


나는 그냥 귀한 집, 귀한 딸로 보이고 싶었나 봐.

'재벌, 부자' 그런 거까진 아니어도...

왜 있잖아, 옛날로 치면 '마을 최진사댁 철없는 셋째 딸' 같은 그런 느낌.

그런데 영자 씨와 정웅 씨는 그런 내 바람을 채워주지 못한다? 싶었어.


그 당시엔 집으로 전화를 거는 사람도 꽤 많았는데 영자 씨는 그 전화를 그냥 넘기는 법이 없었지.

"누구니? 우리 OO는 왜 찾니? 집은 어디니?" 심하게는 "형제자매는?" 하면서 호구조사까지.

"영자 씨!" 하는 나의 찢어지는 한마디를 듣고서야 그 전화는 내게로 넘어왔어.

그 뒤에도 영자 씨는 슬쩍 내방 통화에 귀를 기울이곤 하셨어.


"정말 왜 그래?" 화가 났지만, 내 친구의 반응은 즐거웠어. "정말 재미있는 분이셔~"

'재미있다고?' 난 피가 마른다고... 쓸데없는 말까지 하실까 봐!'


처음엔 그 말이 인사치레려니 했는데, 영자 씨 안부를 궁금해하고 심지어 뵙고 싶다거나, 내가 없는 날은 영자 씨랑 한참 수다 떨다 끊는 사람도 생기면서... 고개를 갸우뚱. '이거 참...' 난감해졌지.

정말 재주야. 영자 씨는 그 방면으로는 타고 난 사람인가 봐.


그러면서 "누구누구 참 애가 괜찮더라." 어쩌고 하면

난 "응, 걔 곧 군대가."

아니면 "육 남매 중 막낸데 누나만 다섯."

그도 아니면 "3대 독자인데 술을 좋아해."

라고 영자 씨가 염려스러워할 만한 조건들을 이것저것 붙여버렸어.

두 번 다시 말 꺼내지 못하게 입구를 아예 봉쇄해 버렸어.

그럼 영자 씨는 잔뜩 슬픈 눈을 하고는 포기를 하셨지.

"에효, 그건 안 되겠다. 네가 할 줄 아는 게 하나 없으니 서로 고생이겠어." 하면서...


좀 너무 한 걸까, 내가? 영자 씨는 정말로 믿었던 걸까? 그 내 말을 몽땅 다?


그러다 어느 날, 마침 그 일이 생겼어.

난생처음 5명의 선남선녀? 가 '애버랜드'를 갔다가 새벽 2시에야 우리 집 앞에 도착하게 되었는데.

집 방향이 모두 달라서 애버랜드에서 가까운 곳부터 한 사람씩 떨궈주고 도착하니 그 시간이었고.

남자 둘, 나 하나 공교롭게도 그리 남았던 거야.


밖에서 기다리던 엄마는 냅다 내리는 나를 낚아채며, 차문을 잡은 채 "너희들은 누구니?"

부드럽지만, 묘하게 섬뜩한 낮은 목소리로 물었어.

애들 둘이 너무 당황해서…

처음엔 아무 말도 못 하다가, 잠시 후 정신을 가다듬은 오 군이


“네, 저희는 누구누구이고요. 오늘 이래저래 이만저만해서 이렇게 되었습니다.

죄송합니다. 급히 오느라 빈손인데… 이거라도…” 하며 휴게소에서 산 *호도과자 한 봉지를 건넸지.


영자 씨는 그 봉지를 받아 들며, 째려보듯 한참을 쳐다보더니,,,


“그래? 그건 그렇고, 다음에도 이렇게 늦을 땐 꼭 집 앞까지 와서 내 딸 집안으로 들어가는 것까지 확인하고 가거라. 요즘 세상이 좀 무섭니?”


“아…, 네~~ ;;”


세상은 항상 무서우니까. 그때도 지금도. 틀린 말은 아니지만...

난 싫었다. 왜 이렇게 내가 싫다는 방법으로만 나를 보호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어.

남들 다 가는 '애버랜드', 가족끼리 다 같이 손잡고 갔던 기억 한 번이 없거든, 난.

그래서 나는 오늘 21살에 7살 어린이마냥 즐거웠는데...

'이렇게까지,,, 부끄럽게 만들다니'...라는 생각밖에는 남지 않았어.


그 이후로는 엄마에게 자꾸만 더 많은 것을 숨기게 되었고.

‘그냥 친구’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엄마의 그 반응은 지나쳤다고 생각했어.

상대방은… 뭐라고 생각했겠어?


그 후로, 둘 중 한 아이는 영자 씨를 은근히 무서워했고, 오 군은 친구처럼 엄마랑 잘 지냈지.

당신 둘 사이엔, 나름의 우정 같은 게 생기기도 했어.

그런데 내가 어학연수를 가고, 오 군은 군대를 가면서 우리 셋의 관계도 그렇게 조용히 정리되었어.

그러고 보니, 그날 새벽에 만난 오 군과 또 한 명의 아이가 영자 씨가 본, 내 ‘남사친’의 전부였던 것 같아.


누구나 핸드폰을 들고 다니는 시대가 되면서는 그나마 집으로 전화하는 사람마저 점점 사라지게 되고, 영자 씨는 그걸 못내 아쉬워하셨지.

이제 내 주변인 이름조차도 알 수가 없다면서...


그날 새벽 영자 씨가 얼떨결에 받아 든 호도과자 봉지가 문득 생각난다.

다 식은 호도과자가 맛있을 리가 없었겠지.

호도과자는 그야말로 따뜻할 때 먹어야 제맛이거든.

레인지에 돌려 먹으면 그런대로 맛이 살지만, 식은 채로 하나 꺼내 먹던 영자 씨는 "이런 걸 돈 주고 사 먹냐"라고 하시더니 옆에다 밀쳐두셨어.


ChatGPT가-그려준-그날의-호도과자.png ChatGPT의 그림솜씨. 저렇게 가득 담겨있진 않았지만...


그리고 그날 아침, 식탁에 빈 봉지만 고이 접혀 있었는데,,, 호도과자는 없다?

빈봉지를 보고 서 있자니 영자 씨가 나와서는 "레인지에 돌려먹으니 맛있더라. 그렇게 한 봉지에 얼마냐?"고 말을 걸어왔어.

나는 "내가 알 게 뭐야!" 해버렸고...

그렇게 사라지는 내 뒤통수에 대고 영자 씨가 뭐라고 하셨을지는 안 들어도 '오디오'지.


"누굴 닮아서 저리 못되었을까?"


내답도 뻔하지. "내가 알 게 뭐야!"




이병헌 님 영화를 보다가 여기까지 생각이 미쳤어요.

영자 씨의 사심(私心) 가득한 눈빛이 생각나서...

배우님의 극 중 진지한 눈빛과 영자 씨의 사심 가득한 눈빛이 묘하게 겹치면서요... :)


이병헌 님은 이민정이라는 배우님과 결혼하셔서 1남1녀를 낳고 잘 살고 있어요. 아마도? 하하.


당신과 나름 잘 통했던 오 군은 벌써 오래전에 결혼해서 딸하나를 두고 잘 살고 있지요.

못 본 지가 꽤 되긴 했는데 좋아 보였어요. 마지막 봤을 때에도...

딸이 본인을 닮았다 해서 "에그머니!~" 놀랐던 기억이...


이혼 노래를 불렀던 안양도 아직까지 별 탈 없이 잘 살고 있고요.

당신 말처럼 미운 정이 더 무서워 미운 남편과 헤어지진 못할 듯합니다.


그리고 내 하나뿐인 동생, 엄마의 소중한 막내딸도 아주아주 잘 살고 있어요.

다른 말로 표현 하고프지만 "잘 지내요."라는 말보다 좋은 표현이 떠오르지 않네요~


우리는 하루하루 잘 살아가고 있어요. 변한 듯 변하지 않은 채로... 그렇게요.

기회가 된다면 나중에 좀 더 자세히 얘기해 줄게요~




영자 씨, 생각해 보니 이병헌 님도 오 군도 당신 살아계실 때 모두 결혼을 하였네요.

좋아라 하시면서 부러워하던 모습이 생각났어요.

그래서 제가 그랬잖아요. "영자 씨도 결혼 한 번 더 할까?"

'**문디 가시나' 맞나봐요, 나는요.



*정식 표기는 '호두과자'

1. ‘호도과자’는 잘못된 표기이지만, 그때 우리가 고속버스 휴게소에서 산 과자 봉지에는 '호도'라고 쓰여 있었던 것 같아서 그냥 기억을 따르기로 한다.

2. ‘호두’는 한자로 胡桃(호도)인데, 예전에는 한자음 그대로 ‘호도’라는 표현도 흔했다고.


**문디가시나: 경상도 사투리로 미친 또는 멍청한 여자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