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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늘 Jun 19. 2023

강의를 마치고

<나만의 8페이지 그림책 만들기>

한 달간의 그림책 만들기 강의가 끝났다.

언제나 강의를 듣는 입장이다가 사람들 앞에 서서 말하는 입장이 되려니 잠을 설칠 정도로 긴장이 되었다. 누가 올까, 이 수업은 왜 듣는 걸까, 뭘 얻어가고 싶을까, 다 듣고 나서 하나라도 건질 게 있을까. 상상만으로도 잠이 안 왔다.

강의를 하겠다 공표하고 수강생을 모집했으니 안 할 수도 없었다. 날짜는 다가오고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나는 이 4주짜리 강의를 해내야 한다. 그리고 이왕이면 죽이 아닌 밥이 되도록 ‘잘’ 해내야 한다!


피치 못할 작은 미션을 만들어 두고 약간의 강제성을 발휘하는 것. 그게 게으른 내가 삶을 끌고 가는 방법이기도 하다. 너무너무 게을러서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누워서 먹고 자다가 인생이 끝나버릴지도 모른다.

끝나면 반드시 나도 얻는 게 있을 테니까, 어쨌든 시간은 가고, 도망가지 않고 부딪혔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또 훌쩍 다른 사람이 되어 있을 테니까! 도망치고 싶을 때마다 그렇게 되뇌곤 하는데 그렇다고 괴롭지 않은 건 아니다. 괴롭고 괴롭고 괴롭다.


“한 번도 안 해봤을 거 아니에요?
난 단 한 번도 안 해봤던 걸 하고 나면 그 전하고는 다른 사람이 돼 있던데.”

- <나의 해방일지> 중에서


아무튼 그래서 했다. 한 달 동안 일주일에 한 번, 네 번의 수업이 끝나자 다섯 권의 그림책이 나왔다. 그리고 내게도 확실한 몇 가지가 남았다.


1. 나는 어떤 수업을 할 수 있을까.

어떤 강의를 해야 하나, 오래 고민했다. 강의는 본업이 아닌 사이드 프로젝트라는 점(당장은 수익이 발생하지 않을 수 있고 그렇기에 꾸준히 지속할 내적 동력이 필요하다. 이를 테면 너무 좋아서 혼자 알기 아깝다던가, 그 자체로 즐겁다던가, 다른 사람에겐 어렵지만 내게는 너무 쉬운 일이라던가 등등)과 언젠가는 본업이 될 수도 있다는 점도 고려해야 했다.


처음엔 출판이나 글쓰기에 관련된 수업을 생각했다. 지금 하고 있는 일과 관련이 있고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업으로 삼고 있는 일이라 그런지 준비하는 과정이 재미가 없었다.

‘전문성이 조금 떨어지더라도 내가 좋아하는 것 중에 찾아보자! 남녀노소 누구나 들을 수 있고, 어떤 주제든 유연하게 적용할 수 있는 거면 더 좋겠다.’



그림 그리기는 내 오랜 취미다. 따로 배운 적은 없고 스무 살 때부터 그냥 끄적끄적 낙서 같은 그림을 그렸다. 그걸로 뭘 해봐야겠다는 생각도 해본 적 없고 그럴 만한 실력도 아니어서 꾸준히 취미란에 이름을 올리곤 했다.

작년에 아이 어린이집에서 생일 파티에서 읽어줄 생일 동화를 만들어 보내라고 숙제를 내줬는데, 그때 처음 그림책 한 권을 만들어 보았다. 마커로 슥슥 그린 허술한 그림책이었는데 아이가 그 그림책을 너무 좋아했다. 그때 이후 종종 그림책을 만든다. 너무 재미있어서 친구들을 불러 모아 같이 만들어보기도 했다. 번뜩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걸 더 많은 사람들과 함께 해보면 어떨까.


어린이집 숙제로 만든 생일 동화
<나는 기다립니다> 읽고 새해 다짐 버전으로 패러디해 만든 그림책


나는 그림책 편집자도 아니고, 그림책 작가는 더더욱 아니지만 ‘취미로 만드는 그림책’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할 말이 많다. 그리고 업으로 하는 책 만드는 일과 달리, 완벽이 아닌 완성에 초점을 두고 즐겁게 공을 들인다.

수업의 목표를 ‘완성하는 기쁨’을 공유하는 것으로 잡았다. 주제를 ‘그림책 출판’이 아닌 ‘8p 그림책 만들기’로 정한 건 그래서다. 당장 나만의 그림책을 ‘출판’해보자고 하면 더 많은 사람이 혹 하겠지만(찾아보니 그런 수업도 꽤 많다), 실무자의 입장에서 출판은 자아실현보다 더 많은 의미를 가진다. 고작 몇 시간짜리 수업을 듣고 바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닐뿐더러, 막상 해보면 인쇄의 기본이 되는 8p를 자기 이야기로 채우는 것도 생각처럼 쉽지 않다.


대신 8p라도 한 권을 완성했다는 느낌을 만끽할 수 있도록 직접 바인딩해 나눠 주기로 했다. 사비로 220g짜리 종이를 주문하고, 색실과 바늘을 사서 밤새 꿰맸다.



2. 쫄지 말자, 호호호(好好好)니까.

수강생들을 처음 만나는 첫 수업이 가장 떨렸다. 수업 준비를 아무리 철저하게 해도, 대문자 I인 나는 낯선 사람 앞에 서는 것 자체가 미션이었다. 게다가 어떤 사람들이 수업을 들으러 올지 모르니 더 긴장이 됐다.

막상 사람들 앞에 서니 이 사람들, 어떤 말을 해도 호호호다. 하긴 생각해 보면 내가 수업을 듣는 입장일 때도 그런 마음이었다. 특히나 들어야 하는 수업이 아니라 듣고 싶어 직접 선택한 수업은 무엇이든 배울 것이 있겠다는 믿음과 호의를 가지곤 했다.

준비만 잘하면 된다. ‘괜히’ 쫄지 말자.


3. 남의 작은 특기를 발견하는 것이 나의 작은 특기!

일을 할 때는 나뿐만 아니라 남에 대한 기준도 높다. 그래서 받는 스트레스도 크다. 무언가를 가르칠 때도 그러면 어쩌지 고민했는데, 전혀!

4주 동안 각각의 이야기가 책으로 만들어지는 과정을 가까이서 지켜보다 보니, 사람마다 특기를 발휘하는 분야가 다르다는 걸 한눈에 볼 수 있었다. 기획을 잘하는 사람, 구성을 잘하는 사람, 글을 잘 쓰는 사람,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 잘하는 부분을 발견해서 독려하고 그 부분을 살려주는 일이 너무 즐거웠다. 그리고 그게 나의 작은 특기임을 알게 됐다.

그렇게 완성된 그림책들


우당탕탕 첫 강의가 끝났다. 완성의 기쁨을 누리기 위해 지난한 마감의 고통을 견뎌야 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기어코 책을 완성해 낸 분들께 진심으로 박수를 쳐줄 수 있었다.

다들 계속 자기 이야기를 만들어 나가기를! 나도 겁도 없이 벌컥 연 새로운 문을 지나 계속 걸어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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