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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여름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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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늘 Jan 26. 2021

경계에서

그러다 보면 나도 더 많은 걸 대변할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

"누나는 언제 생각이 많아져?"

동생이 물었다. 고민 없이 답했다.

"인스타 할 때?"


나는 인스타 계정이 두 개다. 하나는 일상을 공유하는 계정이고, 다른 하나는 간간이 그림을 그려 올리는 계정이다. 일상 계정에는 친구들을 비롯해 비슷한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고, 그림 계정에는 출판사와 일러스트레이터, 자기 작업을 하는 작업자 들과 연결되어 있다. 활발히 업로드를 하지는 않아도 시간이 날 때마다 인스타를 들락거리는데, 요즘은 인스타에 들어가면 전에 없이 심란하다.


일상 계정으로 들어가면 좋은 엄마가 너무 많다. 엄마들이 얼마나 부지런하고 손재주가 좋은지, 내 방보다 예쁘게 꾸며놓은 아기 방에 종류별로 아기 용품이 가득하다. '육아 필수템'이라고 이름 붙은 물건들은 물론이고 엄마 취향의 감성템까지, 게다가 애기를 키워보니 아기 사진을 예쁘게 찍는 것도 일인데 어쩜 그렇게 하나같이 사진을 잘 찍는 걸까.


다른 계정으로 들어가면 멋진 작업자들이 너무 많다. 자기 일을 사랑하고 최선을 다해 일하고 계속해서 꽃을 피워내는 사람들. 새로 나온 책은 왜 그렇게 다 좋아 보이고, 눈여겨보던 작업자들끼리의 콜라보는 왜 괜히 배가 아픈지. SNS를 활용해서 외연을 넓히고 새로운 일을 벌이는 사람들을 한 발짝 너머에서 지켜보며 생각한다. 어쩜 저렇게 자유롭고 겁 없이 하고픈 일을 벌이며 사는 걸까.     


하지만 나도 안다. 그게 전부가 아닌 걸. 내 인스타 피드에도 고르고 골라 즐거운 모습만 전시되어 있다. 인스타를 보며 드는 심란함의 진짜 이유는 아마 내가 경계에 서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일도 잘하고 싶고 좋은 엄마도 되고 싶은 마음에 여기 기웃, 저기 기웃 하다 보면 둘 다 제대로 못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마음만 어지러워지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그건 별로 낯선 감정이 아니다. 대학을 다닐 때도, 잡지사를 다닐 때도, 출판사를 다닐 때도 언제나 나는 경계에서 이도 저도 아닌 채로, 혹은 둘 다인 채로 살았다. 심지어는 모유와 분유도 고르지 못해 혼합수유로... 무튼, 그러니 이쯤이면 정체성으로 받아들일 만도 한데 '좋은 엄마'와 '멋진 작업자'는 둘 다 너무 잘하고 싶은 역할이라서 그런가 보다.


요즘 즐겨보는 <싱어게인>에서 이슈가 된 30호 참가자가 이렇게 말했다.

 "저는 어디서나 애매한 사람이었거든요. 충분히 예술적이지도 않고 충분히 대중적이지도 않고, 록도 아니고 포크도 아니고요. 제가 애매한 경계에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오히려 더 많은 걸 대변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격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역시 둘 다 포기할 수 없다. 경계에서 최선을 다할 밖에. 그러다 보면 나도 더 많은 걸 대변할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 일단은 자장가를 신명 나게 불러서 재우고 다시 노트북을 켜야지. 오늘 밤도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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