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다섯 시 반에 눈이 떠져서 거실로 나갔다. 곤히 잠든 아기 옆에 누워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 보니 어느새 여섯 시 반. 여름이는 알람처럼 정확하게 눈을 번쩍 뜨더니 맘마맘마 하면서 분유를 가리켰다. 반자동으로 거실로 나온 오빠가 분유를 타는 동안, 나는 오빠 엉덩이 밑에 서서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빨리 달라고 보채는 여름이 영상을 찍었다. 오빠와 나란하게 누워 다 먹은 젖병을 던지며 씩 웃는 여름이를 보는 게 참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다시 잠들기는 글렀고, 모처럼 일찍 자전거나 타야겠다고 생각하고 한강에 나왔다. 오후에 비 예보도 있고 이른 시간이라 아무도 없을 줄 알았는데 너무 많은 사람이 있어 놀랐다. 그 와중에 따릉이는 나뿐인 것 같기도 하고.
뛰는 사람, 걷는 사람, 자전거 타는 사람, 유모차 끄는 사람, 풀밭에 누워 있는 사람, 라면 먹는 사람, 멍 때리는 사람.... 주말 이른 아침이라는 게 무색하게 가지각색이다. 수건을 둘러쓰고 맨손 체조하며 걷는 할머니 옆으로 네온 티셔츠를 입은 젊은 여자가 뛰어가는 모습이 특히나 인상적이었다. 그러고 보니 벌써부터 올림픽대로가 밀린다. 부지런한 사람들의 토요일을 처음 구경하는 기분.
사람들만큼이나 시간도 부지런히 흘러 벌써 7월이다. 한 해의 반을 보내 놓고 돌아보니 별로 한 게 없다. 몰라보게 달라진 건 여름이뿐이다. 여름이는 이제 개인기가 많아졌다. 짝짜꿍 하면 손뼉을 치고 죔죔 하면 작은 손을 폈다 오므렸다 한다. 호랑이는 어떻게? 하면 어흥! 하고 포클레인은? 하면 크으으으으~~~ 한다. 똑딱똑딱 하면 포클레인 깜빡이를 켠 뒤 입으로 딱딱딱딱 소리를 내고 시계는 아침부터~~ 까지 노래를 부르면 똑딱똑딱 혀를 찬다. 엉덩이를 들고 일어나서 몇 발짝 정도 혼자 걷기도 하고, 눈치 보며 핸드폰이나 리모컨을 만지다가 주세요! 하면 슬쩍 건네기도 한다. 6개월 전엔 혼자서 목도 잘 못 가누던 아기는 6개월 만에 작은 사람이 되었다. 더디고 무딘 어른의 성장에 익숙해져 있어서 그런가, 빠르고 활기찬 아이의 성장은 볼 때마다 놀랍다!
요즘은 <어린이라는 세계>를 읽고 있다. 어린이의 세계를 온몸으로 체감 중인 요즘이라(엄밀히는 아직 어린이의 세계가 아니라 아기의 세계지만) 더 다정하고 또렷하게 다가오는 문장이 많았다.
이를테면, '어느 쪽이 오른쪽 신발일까 골똘히 생각하면서 우리는 어른이 되었다. 신발 뒤축이 구겨지지 않게 손가락으로 당기며 발을 넣었다가 손가락이 안 빠져서 끙끙대면서 어른이 되었다. 신기 편한 밸크로냐, 예쁜 끈 운동화냐를 두고 고심하면서 어른이 되었다. 현성이 말마따나 그것도 맞지만, 그때도 우리는 우리였다. 지금보다 시간이 걸렸을 뿐이다.' 같은.
또, '나는 어린이의 품위를 지켜 주는 품위 있는 어른이 되고 싶다. 어린이 앞에서만 그러면 연기가 들통나기 쉬우니까 평소에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감사를 자주 표현하고, 사려 깊은 말을 하고, 사회 예절을 지키는 사람. 세상이 떠들썩할 때일수록 더 많이, 결코 자연스럽지 않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마음만으로 되지 않으니 나도 보고 배우고 싶다. 좋은 친구들은 이럴 때 어떻게 하나 기웃거리는 요즘이다.' 같은 문장들.
아기의 세계든 어린이의 세계든 공통점은 어른인 우리를 자꾸 다짐하게 한다는 것이다. 처음엔 개인의 태도 정도를 다짐하다가, 나중엔 환경 보호, 세계 평화 같은 다짐을 (매우) 진지하게 하게 된다. 책을 읽으면서 '다정하고 멋진 어른이 되고 싶다'는 기존의 다짐에 '어린이의 품위를 지켜주는 품위 있는 어른이 되고 싶다'를 더했다.
문득, 좋은 어른이 되는 방법 중 하나가 아이들을 지켜보는 일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기를 낳고 알게 된 것인데, 엄마는 아기를 '키우는' 사람이 아니라 '지켜보는' 사람이다. 그냥 보는 게 아니라 유심히! 배가 고픈가, 안 고픈가, 왜 우나, 졸린가, 똥 쌌나, 심심한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지켜보다 보면 작은 눈짓과 손짓에 담긴 기쁨과 설렘, 뿌듯함, 아쉬움, 속상함, 억울함, 화, 짜증 같은 온갖 감정을 발견할 수 있다. 어른과 다르지 않은 아이의 감정을 캐치한 순간부터는 아이가 '귀여운 생명체'가 아니라 '작은 사람'으로 보인다.
물론 이건 엄마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이것이 포인트다!) <어린이라는 세계>의 저자가 그랬듯, 어떤 어른이든 마음만 먹으면 주변의 아이들을 지켜볼 수 있고, 아이들을 유심히 들여다볼 줄 아는 어른은 반드시 다짐을 하게 된다. 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다짐,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주고 싶은 마음을 담은 다짐을. 그런 어른들이 자기 다짐을 조금씩 이뤄가면서 좋은 어른이 많은 좋은 세상이 된다고 믿는다.
아마도 여름이가 자랄수록 나의 다짐은 점점 늘어날 것이다. 아이의 성장보다는 여전히 느리고 무디겠지만, 그렇게라도 좋은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으면 정말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