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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늘 Dec 10. 2021

게으름과의 전쟁

"온을아, 글 다 썼어?"

벌써 여섯 번 째다. 글쓰겠다고 노트북 앞에 앉은 내게 남편이 지치지도 않고 묻는다.


"왜?(그만 물어라)"

"아니 그냥, 아직인가 해서. 마무리하고 있어?"

"..."

아직 시작도 못했다. 어떤 글을 쓸까 메모장을 뒤적이다가 이번 주에 해야 할 일 리스트를 열어보았고, 우선순위를 정리하고 메일로 온 자료를 확인하느라 30분을 훌쩍 넘겼다. 아니 글쓰기보다 마감을 먼저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아니지 자기소개 질문이 뭐였더라, 하다가 정신을 차리고 막 빈 화면을 켠 참이다. 어쩌면, 아니 당연히 오늘 안에 끝내지 못할 것이다. 남편은 천진한 표정으로 답을 기다린다. '한 시간이면 글 한 편 쓰기에 충분하잖아?' 하는 눈으로.

물론이다. 하지만 나는 아니다.


나는 부팅이 오래 걸리는 오래된 노트북 같은 인간이다. 내가 기억하는 때부터 줄곧 그랬다. 일단 부팅이 되면 밥도 안 먹고 잠도 안 자고 돌아가지만, 그놈의 부팅이 참 어렵다. 글을 쓰려고 앉으면 바로 집중할 수가 없다. 시험공부하기 전에 책상 정리하는 애, 방 청소하다가 오래된 편지 하나하나 읽어보는 애가 바로 나다.

"게을러서 그래."

오빠는 바로 진단명을 내렸다. 인정한다. 생각만 바쁘게 돌아가는 내 세상은 매 순간 게으름과의 전쟁이다.


육아를 하면서 전쟁은 더욱 격해졌다. 지금까지는 그냥 내일의 내가 피 터지게 공백을 메꾸는 식으로 유지가 가능했다. 부팅한답시고 일주일 중 5일을 날리고 나면 이틀 동안 잠도 안 자고 밥도 안 먹고 할 일을 하는 것이다. 그런 내가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언제나 결과가 나쁘지 않았으므로 괜찮았다. 내내 '시간은 흐르지 않고 쌓이는 것'이라는 말을 믿었고, 좋아했다. 내가 이렇게 흘려보낸 시간도 어딘가에 쌓여서 일이 되게끔 하는 데 일조했다고 믿는 것이 정신 건강에 이로우니까.


하지만 아이를 낳고 기르면서 마냥 시간을 흘려보낼 수 없어졌다. 못다 한 일을 처리해줄 '내일의 나'가 오기 전에 당장 눈앞의 일들을 해결해야 한다. 게으르기에는 내가 할 일의 대부분이 아이의 생존과 연결되었다. 매끼 시간 맞춰 밥을 먹여야 하고 당장 손과 엉덩이를 씻겨야 하고 기저귀를 갈아야 한다. 자주 빨래를 해야 하고 치워도 치워도 티가 나지 않는 거실을 계속해서 정리해야 한다. 미룰 수 없는 일들을 해치우기 위해 게으름과 맞서 싸우다 보면 나를 위한 일을 포기하기 일쑤다.


'씻어야 되는데 귀찮네, 먹어야 되는데 귀찮네, 겨울옷 꺼내야 되는데 귀찮네.' 같은 일차원적인 일부터 '운동해야 되는데 귀찮네, 글 써야 하는데 귀찮네, 일해야 되는데 귀찮네.' 같은 일들까지 모조리 다 귀찮다 귀찮아.


그래, 이렇게 만사가 귀찮은 김에 깔끔히 나를 놓아버리면 편하련만 게으른 주제에 욕심도 많다. 할 수 없이 습관을 바꾸는 편을 택하기로 한다. 아기가 잠들면 할 일을 생각해두었다가 아기가 잠들면 '곧바로' 운동을 하거나 글을 쓰거나 교정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주어진 시간은 하루에 두어 시간뿐. 흘려보냈다가는 낭패다.


물론 아직까지는 낭패를 보는 날이 훨씬 더 많다. 그냥 아이와 같이 자버리기도 하고, 지금처럼 뭘 할지 생각만 하다가 끝나기도 한다. 그래도 육아 덕분에 할 일을 곧바로 시작하고 켜켜이 끝내는 즐거움을 쬐끔 맛보았다. 미루고 미루다 마감에 맞춰서 호다닥 끝내는 것이 아니라 적은 시간이지만 며칠을 모아서 완성해내는 경험. '무조건 시작한다. 무엇이든 시작한다.' 그것이 얼마나 큰지 깨닫는 중이다.


여전히 나는 성능이 떨어지는 노트북과 비슷하다. 며칠 '곧바로' 하다가 또 며칠 앓아눕기도 한다. 이 글도 며칠 만에 드디어 완성이다. 남편은 묻다 지쳐 더 이상 글이 언제 올라오냐고 묻지 않지만, 이제 말해줘야지. 드디어 다 썼어, 포기 않고!

이러다 언젠가 '곧바로'의 맛을 넘어 '미리미리'의 맛도 알게 될는지! 두고 볼 일이다. 왠지 그런 날은 오지 않을 것 같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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