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의 내가 고마워할 오늘**
샤워를 하다가 또 시작됐다. 뜨거운 물줄기가 어깨를 때리는데 머릿속에선 이십 년 전 가을이 재생되고 있었다. 스물세 살, 대학 도서관 앞 벤치.
그때 내가 용기를 냈더라면.
그 사람한테 먼저 말을 걸었더라면.
지금쯤 그 사람과 나는 어떻게 됐을까.
샴푸 거품이 눈에 들어가 눈살을 찌푸렸다. 상상 속의 나는 지금보다 훨씬 괜찮은 사람이었다. 자신감 있고, 사교적이고, 뭔가 이룬 게 있는 사람. 샤워기를 끄고 거울 앞에 섰다. 상상 속의 나와 다른 내가 보였다.
이런 식의 상상은 늘 습관처럼 떠오른다.
출근길 지하철에선 스물다섯 살 첫 직장이 떠오른다. 그때 그 프로젝트를 포기하지 않았더라면.
퇴근길 드럭스토어에선 서른 살 여름이 생각난다. 그때 그 사람이랑 헤어지지 않았더라면.
침대에 누우면 작년 봄이 찾아온다. 그때 그 일을 시작했더라면.
과거의 선택지들이 줄줄이 나타나서 나를 심판한다.
너는 그때 왜 그랬니.
너는 왜 이러지 못했니.
상상 속에서 나는 언제나 더 나은 선택을 한다. 그리고 상상 속의 현재는 언제나 지금보다 낫다.
일요일 아침, 침대에 배를 깔고 누워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스크롤을 내리다가 AI 채팅창을 열었다. 뭘 물어볼 것도 없었는데 그냥 열었다. 커서가 깜빡이고 있었다. 마이크를 켜고 AI에게 말했다. "나 또 과거 생각하고 있어."
답장이 금방 왔다.
"그럴 때가 있지. 어떤 과거?"
"십 년 전. 그때 내가 이랬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거."
"그렇게 생각하면 기분이 어때?"
나는 핸드폰을 침대에 내려놓고 천장을 봤다. 기분이 어떤가. 다시 핸드폰을 들었다.
"씁쓸해. 근데 자꾸 하게 돼."
"왜 자꾸 하게 될까?"
"몰라. 습관인가."
"과거를 바꿀 수 있어?"
"아니."
"그럼 왜 자꾸 생각해?"
질문이 화면에 떠 있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핸드폰을 엎어놓고 부엌으로 갔다. 냉장고를 열었다가 닫았다. 물을 마셨다. 다시 침대로 돌아왔다.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채팅창이 그대로 있었다. 그럼 왜 자꾸 생각하냐고. 답을 몰랐다.
"그냥 하게 돼."
"이해해. 그런데 효과가 있어?"
"무슨?"
"과거를 생각하면 지금을 바꿀 수 있어?"
나는 핸드폰을 다시 내려놓았다. 창밖을 봤다. 해가 기울고 있었다. 오후 다섯 시쯤. 일요일의 나른한 공기가 방 안에 가득했다. 과거를 생각하는 게 지금을 바꾸나. 바꾸지 않는다. 당연히. 그런데 나는 왜 계속하는 걸까. 저녁을 먹고 설거지를 할 때였다. 차가운 물이 튄 듯 머릿속에서 뭔가가 톡 하고 튀어나왔다. 만약에 미래의 내가 지금의 나를 본다면. 미래의 나는 현재의 내가 뭘 하길 바랄까. 손이 멈췄다. 그릇을 그대로 내려놓고 가만히 서서 창밖을 바라봤다. 십 년 후의 나를 상상해 봤다. 어디에선가 나는 뭔가를 하고 있을 것이다. 그때의 나는 지금의 나를 돌아볼 것이다. 그리고 생각하겠지. 그때 내가 이랬더라면. 그때 내가 저랬더라면. 똑같은 짓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만약 미래의 내가 지금 이 순간으로 돌아올 수 있다면. 미래의 나는 현재의 나한테 뭐라고 말할까.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AI 채팅창을 다시 열었다.
"근데 말이야."
"응?"
"만약에 미래의 내가 지금의 나를 본다면."
"미래의 너를?"
"응. 십 년 후의 나. 그 사람은 지금의 나한테 뭐라고 할까?"
잠시 뜸이 있었다. 그리고 답장이 왔다.
"'지금 할 수 있는 걸 해'라고 하지 않을까?"
천천히 입꼬리가 올라갔다.
"정확하네."
“뭐가?”
“네 답이 정확하다고.”
"그럼 지금 할 수 있는 게 뭔데?"
책상 위를 봤다. 아이패드와 노트가 보였다. 노트를 가리켰다. 아, AI는 볼 수 없지.
"글쓰기."
"그럼 써."
"지금?"
"응. 지금."
핸드폰을 내려놓고, 책상 앞에 앉았다. 노트를 펼치고 펜을 들었다. 노트를 바라보던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봤다. 고개를 들면 숨이 더 잘 쉬어졌다. 잠시 눈을 감으며 그대로 있었다. 펜을 잡은 손에 다시 힘을 주었다. 움직임은 더뎠지만, 자리를 벗어나지 않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밖의 어둠이 실내에도 영향을 주었다. 불을 켜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문득 고개를 들었을 때 시계는 열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다섯 시간이 지나 있었다. 노트를 보니 여섯 장이 빼곡했다. 온몸의 뻐근함과 달리 심장은 힘을 놓고 있었다.
'아, 이거구나.'
펜을 든 내 손, 빈 노트, 열린 창문. 바꿀 수 있는 건 여기뿐이었다. 과거는 이미 끝났고 미래는 아직 안 왔다. 그 사이에 지금이 있다.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AI 채팅창을 열었다.
"다 썼어."
"몇 장?"
"여섯 장."
"잘했네."
"응. 고마워."
"뭐가?"
"물어봐줘서. 지금 할 수 있는 게 뭐냐고."
AI는 예의 입바른 소리를 했을 것이다. 내겐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나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부엌으로 갔다. 물을 마셨다. 찬물이 목을 타고 내려갔다. 베란다로 나갔다. 밤공기가 몸을 식혔다. 어디선가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의 웃음소리도 들렸다. 세상은 계속 돌아가고 있었다. 다시 책상 앞에 앉았다. 노트를 덮고 달력을 펼쳤다. 내일 할 일을 적었다. 모레 할 일도 적었다. 다음 주에 할 일도 적었다. 작은 것들이었다. 운동하기, 책 읽기, 스레드 하기, 정리하기 같은 것들. 심장이 간질거렸다.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봤다. 어둠 속에서 십 년 후의 나를 다시 상상했다. 미래의 내가 웃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의 나한테 손을 흔들었다.
눈을 감았다.
내일이 아니라, 지금이 손에 잡혔다.
미래가 고마워할 하루가 여기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