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바심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by 윤지니

새벽 1시.


탑승 게이트 의자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비행 중에 읽을 책과 영화를 골라뒀는데 어느 것 하나 손에 잡히지 않았다. 잠이라도 오면 좋으련만 오지 않았다. 알람을 맞추고 의자에 길게 누웠다. 새벽이라 사람이 적은데도 인기척이 자꾸 거슬렸다. 캐리어 바퀴가 바닥을 긁고 지나가고, 저 멀리서 화장실 문이 열리고 닫혔다.

에잇.

일어나 앉아 휴대폰을 켰다.

2월 13일.

2026년이 한 달 하고도 절반을 지나고 있었다. 매일 바빴다. 강의 준비를 하고, 글을 쓰고, 책을 읽고, 잠들기 전에 내일 할 일을 적었다. 바빴는데 손에 쥐어진 건 없었다. 수학 강사로 일한 시간은 선명한데, 작가가 되겠다고 마음먹은 이후의 시간은 자꾸 흐릿해졌다. 안 한 건 아닌데,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과 큰 차이가 느껴지지 않았다. 비행기에 타서도 잠은 오지 않았다.


막 눈이 감기려는데 안내 방송이 나왔다. 10분 후 착륙. 주섬주섬 휴대폰을 꺼내 호텔까지 가는 버스 정류소 위치를 다시 확인했다. 이번 여행에서 내가 유일하게 애를 쓴 건 호텔을 찾아가는 방법뿐이었다.


호텔에 도착하자 하루 먼저 여행을 시작한 가족이 나를 맞았다. 이른 아침인데도 다들 깨어 있었다. 연착된 비행기로 늦게 도착한 나를 기다리던 눈치였다. 짐을 내려놓자마자 새언니 손에 이끌려 화장실로 갔다. 엄마, 아빠, 오빠가 일렬로 서 있었다. 새언니가 끈끈이 장난감을 건넸다.


"아가씨한테 미리 말을 못 했는데, 우리 여행 동안 점심은 게임에서 진 사람이 쏘기로 했어요. 아버님도요!"


그렇게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화장실 벽에 끈끈이를 던졌다. 꼴찌가 정해질 때까지 던지고 또 던졌다. 최대한 오래 붙어 있게 던지려면 어떻게 던져야 하나, 그 생각뿐이었다. 촉촉한 고무가 벽에 붙었다가 천천히 미끄러졌다. 손바닥에 남은 끈적임을 괜히 오래 문질렀다.


여행 비용을 전부 지불한 아빠와 일정을 짜느라 수고한 오빠에 비해 나는 지도 하나 캡처해 둔 것 말고는 준비한 게 없었다. 그래서 밥이라도 살 생각이었다. 하지만 호의로 사는 밥과 내기에 져서 사는 밥은 다르다. 장난감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가씨~ 아침에 어머님 드실 죽 사러 가려고 하는데, 같이 가실래요? 쉬고 싶으면 쉬셔도 돼요."


머릿속에서 화요일이 스쳤다. 지금 안 쓰면 또 밀린다. 하지만 입이 먼저 열렸다.


"같이 가요."


"아가씨~ 이거 할 건데 같이하실래요? 쉬셔도 돼요."


새언니가 새로운 걸 제안할 때마다, 잠깐의 망설임도 없이 하겠다는 말이 튀어나왔다. 게임으로 올라간 흥 덕분이었다. 문제는 저녁이었다. 숙소로 돌아와 노트북을 열었다. 커서를 몇 번이나 옮겼다. 문장을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다가, 그대로 엎드린 채 잠이 들었다. 게임으로 올라온 흥은 글을 쓰는 감각까지 열어주지 않았다. 피곤하다는 핑계로 노트북을 덮었다. 늘 이런 식이다. 답답한 마음에 스레드에 글을 썼다.


‘왜 글은 발등에 불이 떨어져야만 써지는 걸까.’


결국 한 자도 쓰지 못한 채 월요일 아침을 맞았다. 매주 화요일은 브런치에 에세이를 올리는 날이다. 전에 써둔 글들을 읽어 봤지만 올릴 만한 게 없었다. 거리를 걸으며 사진을 찍다가도 한숨이 났다. 카메라 너머로 홍콩의 거리가 보이는데, 눈에 들어오는 건 거리가 아니라 텅 빈 원고였다. 고개를 들었다. 높은 건물 사이로 하늘이 좁게 보였다. 홍콩의 하늘은 서울의 하늘과 별다를 게 없었다. 거기서도 여기서도 나는 마감을 생각하고 있었다. 뒤에서 새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버님 저 티파니 사 주세요. 오! 저기 샤넬도 있다."


지나치는 가게를 하나하나 들여다보느라 오빠와 엄마로부터 점점 멀어지던 아빠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어디 어디? 안 보이는데?"


이미 지나친 가게를 찾는 척하는 아빠의 팔짱을 새언니가 얼른 낚아채 나를 앞질렀다. 새언니와 아빠 너머로 오빠와 엄마가 보였다. 오빠는 휴대폰과 간판을 번갈아 보며 틈틈이 엄마를 챙겼고, 엄마는 주변을 둘러보다가도 오빠의 보폭에 맞춰 걷는 걸 놓치지 않았다.


좋은 장면이었다. 모두가 홍콩에 있는데 나만 없었다. 몸은 여기 서 있는데 마음은 쓰이지 않는 원고 앞에 앉아 있었다. 멀어져 가는 가족의 뒷모습을 가만히 서서 바라봤다. 오빠의 뒷모습이 사라지고 나서야 정신이 들었다. 걸음을 재촉해 아빠와 새언니 곁으로 다가갔다. 아빠의 남은 팔짱을 끼며 말했다.


"나도 티파니 사 줘."


아빠의 걸음이 더 빨라졌다. 보폭을 맞추느라 숨이 조금 가빠졌다. 그런데 이상하게, 걸음이 빨라지니까 머릿속이 조용해졌다.


가족들이 잠든 뒤, 잘 나온 사진을 골랐다. 그 위에 글을 얹었다.


오늘은 여행을 핑계 삼아 쉬어갑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브런치 '발행' 버튼을 눌렀다. 3분도 걸리지 않았다. 노트북을 치우고 이불을 덮었다. 금세 잠에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