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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늘 Oct 26. 2023

태양의 아들

미셸 투르니에,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

미셸 투르니에의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은 영국 작가 대니얼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를 재해석해 다시 쓴 소설이다. 무인도에 조난된 로빈슨 크루소가 섬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에 대해 쓴 것은 두 소설의 공통적인 골자이다. 


다만 대니얼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는 주인공이 경험하는 모험에 초점이 맞춰진 반면, 미셸 투르니에의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은 주인공이 섬에 머무는 동안 겪는 내면의 변화와 원주민 방드르디와의 역동이 중요한 내용이 된다. 특히 철학적이고 정신분석학적이면서 신화적인 상징들이 끝없이 이어져 이 책에 대한 해석은 무척 다양하리라 예상된다. 오늘은 ‘태양의 아들, 로빈슨 크루소’와 ‘분화된 자아로서의 방드르디’라는 두 개의 작은 주제와 연결 지어 떠오른 것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태풍을 만난 ‘버지니아 호’가 좌초된 후 로빈슨 크루소는 무인도로 떠밀려가 살아남는다. 그는 혼돈 속에서 밀림에 가까운 섬 곳곳을 둘러보다 숫염소 한 마리를 발견하고는, 염소를 몽둥이로 후려갈겨 죽인다. 그가 염소를 죽인 이유는 공포심 때문이었다. 표면적으로는 껄껄 웃는 것 같은 염소에 대한 두려움이었지만 실상은 그가 처한 상황과 섬 자체에 대한 공포심이었다. 


그는 훗날 자신을 다시 태어나게 하는 동굴도 발견하지만 차마 그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엄두도 낼 수 없었다. 타자가 존재하지 않는 완전한 고립은 자신의 실존마저 위협하는 일었다. 그는 서둘러 자신에게 가장 익숙한 문명의 질서 속으로 스스로를 밀어 넣는다. 배를 제작해 탈출을 도모하고자 하는 계획이 무산되자 그는 섬의 이름을 여성적인 느낌이 나는 ‘스페란차’라고 지은 뒤 농사를 짓고, 달력을 만들고, 헌장과 형법 등을 정리하며 스스로를 섬의 총독으로 임명한다. 그는 “스페란차 섬의 형법 제1조”(p.89)에서 주석을 달아 법 조항의 세부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구덩이는 햇볕에 노출되어 하루 중 가장 뜨거운 여섯 시간 동안 햇살이 침처럼 와서 꽂히도록 되어 있다.”(p.89)     


스페란차 섬에서 로빈슨이 바라보는 태양은 작물을 키워주는 동시에 질서에서 벗어나면 형벌 그 자체가 되는 엄격한 아버지이다. 더할 수 없는 창의성과 맥가이버가 환생한 듯한 기술력으로 인간에게 필요한 대부분의 시설과 장치들을 복원한 로빈슨은 이제 “섬의 가장 은밀한 내면”(p.122)에 가 닿고자 한다. 그곳은 “두 개의 시선이, 즉 빛의 시선과 암흑의 시선이 서로 마주치”며 “태양의 화살 하나가 스페란차의 대지적 혼을 꿰뚫은”(p.131) 장소이다. 로빈슨은 태양이 닿는 영역을 지나 스페란차의 가장 내밀한 곳까지 밀고 나아간다. 


그가 섬의 자궁까지 도달하는 과정은 기묘하게 성애적인 느낌을 띠는 동시에, 태아 상태로 되돌아간 그를 다시 태어나게 한다. 결과적으로 그는 태양이 지배하는 섬을 정복하기 위해 그의 상징적인 아버지를 배신한 것이다. 이후 로빈슨의 행보는 원시적이고 신화적인 이미지로 점철되며 섬과 동화되는 모습을 보인다. 섬을 향한 그의 성애적 사랑은 새로운 식물 ‘만드라고라’를 자라게 하고, 밤새 수염이 자라나 땅속에 뿌리를 내리게도 한다.      


한편, 섬을 향한 성애적 사랑은 로빈슨의 것만은 아니었다. 배신은 돌고 돌아 이제 로빈슨 자신을 향한다. 로빈슨은 자신이 구해준 원주민에게 ‘방드르디’라는 무성의한 이름을 지어준다. 그러나 정작 방드르디는 이름 따위 아무 상관도 없었을 것이다. 그에게는 로빈슨이 겪은 고뇌의 과정이 존재하지 않는다. 방드르디는 마냥 자유롭고 로빈슨이 섬에서 처음으로 만났던 염소처럼 깔깔 웃어대며 그가 지배하는 섬의 질서를 파괴한다.    

  

방드르디는 완전히 선의로 가득 차 있긴 하지만 아직 매우 어리다. 그렇게 때문에 때때로 그는 자신도 모르게 어리광을 부린다. 그래서 그는 웃는다. 무시무시할 정도로 폭소를 터뜨린다. 그 웃음은 총독과 그가 통치하는 섬의 겉모습을 장식하고 있는 그 거짓된 심각성의 가면을 벗겨 뒤죽박죽으로 만든다. 로빈슨은 자기의 질서를 파괴하고 권위를 흔들어놓는 그 어린 웃음의 폭발을 증오한다. 사실 바로 방드르디의 그 웃음 때문에 그의 주인은 처음으로 그에게 손찌검을 했다. (p.183)     


방드르디는 로빈슨이 하는 모든 것을 행한다. 섬의 대지와 성애적 사랑을 나누고 “밤색 얼룩무늬가 진 흰 꽃”(p.205)을 피워낸다. 로빈슨이 아껴 피우는 파이프 담배를 몰래 피우기도 한다. 로빈슨이 하지 않는 일도 벌인다. 논의 물을 빼버리고, 춤을 추며, 껄껄 웃는다. 


로빈슨은 가끔 “죽음에 대한 생각”을 하곤 한다. “자연사이거나 사고사이거나 혹은 방드르디에 의해서 야기되는 죽음”(p. 215)에 대한 생각을. 섬의 질서와 힘은 이제 어디로 옮겨갈 것인가. 방드르디의 로빈슨을 향한 은근한 도전은 이제 전면적인 것으로 뒤바뀐다. 그것은 방드르디가 목숨을 걸고 숫염소 앙도아르와 대결을 벌이면서 정점으로 향한다. 방드르디는 그 ‘통과의례’ 사건을 통해 섬의 진정한 통치자로 거듭난다.      


앙도아르는 바로 나였다. 족장처럼 수염이 자라고 땀으로 미끈거리는 가슴털이 난 고독하고 고집 센 저 늙은 수컷, 창처럼 갈라진 네 발굽으로 돌덩어리 산속에 억척같이 발 딛고 선 저 야수는 바로 나였다. 방드르디는 그에 대하여 기이한 우정에 사로잡혔고 그들 사이에는 잔혹한 유희가 벌어진 것이었다. "앙도아르가 공중에 날면서 노래하게 만들겠어."하고 그 아라우칸 족은 몇 번이고 말하곤 했다. 그러나 그 늙은 숫염소를 바람의 세계로 변질시키기 위해서 그는 그 시체로 하여금 얼마나 여러 가지 시련을 거치게 했던가! (p.283)   

  

로빈슨이 내심 짐작했듯 방드르디는 섬에서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구축한 질서를 폭발시켜 모든 것을 원점으로 돌린다. 방드르디는 아버지로서의 태양을 다시 불러오며, 로빈슨을 자연의 질서에 길들이는 것으로 스스로 그 왕좌에 앉는가 싶더니 이내 사라져 버린다.   



한편, 방드르디의 등장과 갑작스러운 사라짐의 시점이 매우 흥미롭다. 로빈슨이 섬과 동화되기 시작할 시점에 등장한 방드르디는 숫염소 앙도아르와의 대결을 통한 통과의례를 거친 후 다시 섬을 원초적인 모습으로 되돌린 후 사라진다. 그것은 로빈슨의 분화된 자아로서의 방드르디를 상징하는 것은 아닐까. 방드르디 등장 직전까지 섬과 동화된 모습을 보였던 로빈슨이 방드르디 등장 후 자신이 구축한 질서에 집착하는 모습이 약간 의아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방드르디가 타자가 아닌, 로빈슨 내면의 분화된 자아의 일부라면 가능한 설정이 아닐까 한다. 문명인 로빈슨과 원초적인 방드르디의 대결은 로빈슨의 내면에서 일어난 사건이며, 문명의 질서를 폭파시킨 후 방드르디가 사라진 것은 결국 로빈슨이 이룬 내적 통합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 로빈슨은 “태양의 황홀경”(P.319)을 정면으로 바라본다. “광채가 치명적인 더러움을 씻어주고, 불칼 하나가 그의 몸속으로 박혀 들어오면서 그의 존재를 송두리째 환하게” 밝혀주었다. 그것은 “갑옷”과 “구리 가면”이 되어주고, “깊은 영감이 완전한 흡족함의 감정으로 그를 가득” 채운다. 태양을 배신하는 것으로 아버지가 된 로빈슨은 이제 태양 그 자체가 된 것이다. 방드르디가 떠나고 새로운 친구인 ‘죄디’와 단 둘이 살아갈 로빈슨 크루소의 일생이 행복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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