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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늘 Oct 10. 2024

내 인생이 망한 이유

에밀 졸라의 <아소무아르>, 민음사

"한 잔 더 할래요?" 벡살레가 물었다.
제르베즈는 아니라고, 이제 됐다고 대답하면서 조금 머뭇거렸다.

아니스 술 때문에 가슴이 울렁거렸다. 차라리 좀 독한 것을 마시면 속이 훨씬 편할 것 같았다.

제르베즈는 뒤쪽의 증류기를 힐끗거렸다. 가마솥처럼 생긴 기계는 마치 땜장이 마누라의 뚱뚱한 배에 길고 구불구불한 코를 붙여 놓은 것 같았다.

보고 있노라니 어깨에 전율이, 욕망이 뒤섞인 공포 같은 것이 일었다. 그랬다. 그것은 꼭 덩치 큰 매춘부, 창자에서 한 방울 한 방울 불길을 뽑아내는 마녀 배 속의 금속 장기 같았다. 진정 독물이 흘러나오는 샘이었다.

저런 건 지하실에 묻어 버려야 하는데! 너무도 뻔뻔하고 가증스럽지 않은가!

그런데도 제르베즈는 자꾸만 코를 담그고 냄새를 맡고 싶었고, 설령 혀를 데이더라도, 오렌지 껍질처럼 벗겨지더라도 저 더러운 것을 맛보고 싶었다.

<아소무아르 2, 189쪽, 민음사>


육감적인 문체로 인간 바닥의 욕망을 드러내는 에밀 졸라의 장편소설 <아소무아르>, 이렇게 적고 보니 진심 '막장 드라마' 재질이다.


과연 이 소설은 처음부터 재미있었다. 보통은 100페이지 정도는 읽어야 그 소설의 세계관에 빠지게 되는데 말이다.

바람이 나 도망가버린 것 같은 동거남 랑티에를 기다리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제르베즈의 모습이 이 소설의 첫 장면이다.


더러운 여관방에서 새벽까지 잠 못 이루고 창문으로 거리를 바라보는 제르베즈의 눈에 길게 줄지어 일터로 나가는 노동자들이 보인다. 그 길 끝에 있는 대도시 파리는 "입을 벌려 (...) 사람들을 하나씩 집어삼키는" 포식자로 그려진다.



당시 산업 사회를 지배했던 기계는 노동의 가치를 떨어뜨렸다. 종일 일해도 가난은 떨칠 수 없는 수렁처럼 노동자들의 삶을 삼켰다.


정치는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고, 노동자들은 모순적인 사회구조 속에서 분노하다가도 곧 그것을 잊었다. 그들이 머무는 더러운 거리 곳곳에는 값싸게 현실을 잊게 해주는 술이 있었으니까.     


구제는 심술궂은 사람은 아니었지만, 때로 피핀을 들고 이 쇳덩이를 부숴 버리고 싶다고 했다. 그는 이 기계의 팔이 자기 팔보다 더 단단하다는 것 때문에 참을 수 없이 화가 났다.

사람의 살이 쇠와 싸울 수는 없다고 스스로 타이르면서도 화를 삭일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 언젠가 기계가 노동자를 죽이고 말 거라는 생각을 했다.

하루 12프랑이던 임금이 이미 9프랑으로 떨어졌고, 더 낮아진다는 말도 돌았다. 커다란 짐승처럼 버티고 서 있는 기계들, 소시지를 만들듯 리벳과 볼트를 만들어 내는 기계들은 어디 하나 유쾌한 게 없었다. (...)

"그래요, 이 놈이 우릴 쫓아내게 될 겁니다. 뭐, 더 시간이 가면 모든 사람의 행복에 기여할지도 모르죠."

<아소무아르 1, 278쪽, 민음사>


가난은 여성과 어린이에게 특히 더 가혹했다. 자신의 속치마까지 전당포에 맡겨가며 돈을 깡그리 써버리는 양아치 동거남은 차라리 없는 것이 나으련만, 제르베즈가 전전긍긍하는 것은 아이들까지 딸린 자신이 맨 손으로 먹고살 길이 아득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후 제르베즈의 생사여탈권은, 양아치 동거남 랑티에, 처음에는 건실했던 쿠포, 순수한 영혼 한줄기 빛이었던 구제, 이 세 명의 남성 인물들이 쥐고 있다.



특히, 일을 하다 지붕에서 떨어진 뒤 갑작스레 발현된 건달끼와 알코올중독으로 인생을 시궁창에 처박아버린 쿠포는 이럴 거면 왜 결혼을 했느냐고 찾아가서 묻고 싶을 만큼 크게 변모한다.



쿠포의 사고는 꽤 상징적인 것으로 느껴졌는데 이 소설이 그리고 있는 것이 바로 등장인물들의 '하락' 혹은 '추락'이기 때문이다.


제르베즈는 구제에게 빌린 돈으로 세탁소를 운영하며 약간 상승하기는 한다. 그러나 세탁소가 잘 되고 있을 때에도 그녀의 삶과 주변에는 도저히 메워지지 않는 미세한 균열과 불행의 분위기가 있었다.


때로는 제르베즈 자신이 균열의 원인이 되기도 했는데, 그것은 갑작스러운 게으름과 무감각, 멈출 수 없는 식욕으로 드러났다.


그렇다고 해도 남편 쿠포과 마찬가지로 알코올중독에 빠져 행려병자나 다름없이 죽어버린 제르베즈의 마지막은 그녀의 입장에서 본다면 꽤 가혹한 결말이다.


스스로 욕심이 없다고 말하면서도 제르베즈는 세탁소를 열심히 운영했고, 세탁소를 차리기 전에도 삯빨래를 해가면서 나름 성실하게 생활해 왔던 것이다.


제르베즈의 추락에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하는 인물은 양아치 X 랑티에다. 랑티에는 쿠포를 구워삶아 그에게 독주를 권하고, 제르베즈의 집 한 칸에 자신의 방을 마련했으며, 이어 제르베즈와 육체적인 관계까지 맺는다.


마침내 세탁소를 망하게 하는 것으로 제르베즈의 모든 것을 삼킨다. 더 이상 뽑아먹을 것이 없어지자 랑티에는 다른 먹잇감으로 시선을 돌린다. 만약 랑티에가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면 제르베즈의 삶은 원래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지 않았을까?



이 소설을 읽으며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가 떠올랐는데, 상승하고자 하는 욕구가 강했던 엠마 또한 자신의 욕망을 기가 막히게 읽어내 빨대를 꽂아버린 뢰뢰로 인해 급격히 추락하며 생을 마감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큰 욕심 없이 세탁소를 운영하며 평범하게 살고 싶었던 제르베즈와 귀족처럼 화려하게 살고 싶었지만 결국 비소를 삼키고 죽어버린 엠마의 운명이 다르면서도 비슷한 것이 시대의 한계처럼 다가오기도 했다.


혼자 살지 결혼은 뭐 하러 해가지고 가정을 파탄에 이르게 하며 자신의 불행을 배우자에게까지 전이시킨 쿠포와 엠마를 지켜보며 이건 뭐 본격 비혼 권장 소설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개인의 불행은 개인의 것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엠마도 쿠포와 제르베즈도 시대의 모순에 갇혀있었던 인물이다.


시대의 모순을 개인의 힘으로만 뚫고 나아가라는 것은 가혹한 주문이다. 제르베즈에게 왜 너까지 술을 마셨냐고 따지지 말자. 오늘의 시름을 한 잔 술로 달래본 경험이 우리 모두에게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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