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을 읽었다. 도무지 적응되지 않았던 일본소설 특유의 정서를 ‘그러려니’ 생각하며 흐린 눈으로 넘길 수 있었다. 문체가 웹소설 같아서 아무 생각 없이 쭉쭉 읽었고 문장들 속에 스며있는 키치적인 B급 정서들이 느껴질 때마다, 내용이 이렇게 울적한데 이래도 되는 건지 의심하며, 그래도 자주 웃었다.
이 소설을 읽으며 느꼈던 것은 그게 다였다. 아무런 얘깃거리도 찾을 수 없었다. 사실은 작가가 이 책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조차 알 수 없었다. 개인적으로 <인간실격>은 완성도에 비해 운이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패전 후 일본사회의 무기력과 요조의 추락이 결을 같이 하면서 여태껏 명작의 반열에 오르내리게 되었으니 말이다.
<인간실격>을 과연 소설다운 소설이라고 볼 수 있을까. 자전적 이야기를 다룬 소설을 모조리 후려치기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소설이냐 배설이냐’ 그것이 문제인 것이다.
<인간실격>을 거의 읽어갈 즈음, 모드 쥘리앵의 <완벽한 아이>도 읽기 시작했다. 이 책도 저자 모드 쥘리앵의 경험을 녹여낸 책이다. 믿어지지 않을 만큼 극적인 이야기로 채워져 있어서 자전적 소설인 줄 알았는데 에세이였다는 것을 책을 다 읽고서야 알았다.
<완벽한 아이>는 잘못된 신념에 사로잡힌 아버지가 자신만의 저택을 어떻게 감옥으로 만들어버렸는지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에게는 특별한 계획이 있었다. 그를 위해 우선 자식 많은 광부의 막내딸을 입양해 키우기 시작한다. 광부의 딸을 기숙학교며 대학까지 보내면서 결국에는 자신의 아내로 삼는다. 그리고 모드 쥘리앵이 태어난다. 모드가 서너 살이 되었을 무렵에는 한적한 곳에 저택을 마련하여 무려 15년 동안 칩거하기에 이른다. 모드를 가르치는 것은 그의 젊은 아내다. 처음부터 그럴 목적으로 교육시킨 것이다. 모드를 타락하고 오염된 세상으로부터 차단하는 한편, 아버지의 세계에 걸맞은 초인으로 키우겠다는 계획은 그토록 긴 시간 동안 진행되었다.
이따금씩 아버지는 절대 집 밖으로 나가면 안 된다고, 아버지가 죽고 난 뒤에도 안 된다고 잘라 말한다. 아버지의 기억이 이 집 안에 계속 살아갈 테니 그것을 지키면서 살면 나는 안전할 수 있다. 하지만 어떨 때는 다른 소리도 한다. 나중에 나는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다. 나는 프랑스의 대통령이 되고 세상의 주인이 될 수 있다. '평범한 여자'의 삶을 살기 위해 집을 떠나는 어리석은 짓을 해선 안 된다. 내가 집을 떠나게 된다면 그것은 온 세상을 손에 넣고 '위대한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서다. 그렇게 떠난 뒤에도 때때로 '근원'으로 돌아와 힘을 충전해야 한다. 나의 근원은 바로 아버지의 힘이 매일매일 배어드는 이 집이다. <완벽한 아이, 36-37쪽>
모드를 조종하는 힘은 공포와 깊은 죄의식이다. 아버지는 아주 사소한 것까지 자신만의 규율에 맞추도록 지시하며 어머니는 아버지를 돕는 꼭두각시 인형일 뿐이다. 아직 어린이인 모드에게 애정 어린 돌봄이란 꿈꿀 수도 없을 사치다.
그러나 모드의 시간은 죽음에서 삶으로 확장된다. 모드의 내면은 은밀하게 작은 동물들과 정서적으로 교류하며, 음악과 문학을 통해 스스로의 영혼을 먹이고 입힌다. 끈질기게 삶과 빛과 자유를 향해 나아가고 마는 것이다.
일인칭 시점의 장점을 완벽하게 살려 쓴 글을 읽는 내내 나는 모드의 일부가 된 것 같았다. 모드의 고통과 희망을 섬세하게 직조한 문장의 집 안에 모드와 함께 갇힌 것 같았다. 지하실에서, 어두운 정원에서, 춥고 꽉 막힌 방 안에서, 모드의 시간을 함께 버텼다. 울고 싶었지만 목이 막혀 울 수도 없었다.
모드 쥘리앵은 마지막 문장에서 자신의 탈출을 도와준 음악 선생님을 언급하며 "선생님은 내 아버지와 정반대 편에 선, 아버지가 틀렸음을 말해주는 증거였다. 인간들은 훌륭하다(323쪽)"라고 쓰고 있다. 인간들은 훌륭하다. 죽음까지 살아낸 작은 아이였던 모드 쥘리앵의 말이다. <인간실격>의 요조는 절대 알 수 없을 묵직한 한마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