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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늘 Feb 24. 2017

어차피 늦었으니까
느리게 살기로 했어

평일 한낮, 홍대의 거리는 한적했다. 눈이 온 다음날이라 검은 바닥은 죄다 젖어있었다. 그 위를 걸으며 시험에 합격한 사람들 이야기를 했다. 작은 돈까스 가게 창가자리에 앉으면서도 우리는 쉽사리 다른 주제를 꺼내지 못했다. 각자 횟수로만 세 번째, 두 번째 시험을 끝내고 나서였다. 


그리고 얼마 전, 새해가 시작되며 우리는 또 한 번의 결과를 받았다. 사계절을 지나며 잘될 거라 희망을 품기도 했고, 불안해하며 잠을 설치기도 했다. 그리고 다시 겨울을 맞은 우리는 제자리로 돌아왔다. 이번에는 연남동의 지하가게를 택했다. 꼭 그러자고 한 건 아니지만, 이번에도 돈까스를 앞에 두고 지난 1년, 앞으로의 1년을 이야기했다. 그때와 달라진 거라곤 길어진 머리카락과 한 살 더해진 나이, 조금 더 쪼그라든 마음이다. 


음식이 나오기 전 언니는 말했다. 



어차피 늦었으니까, 느리게 살기로 했어.
아직 순서가 안 왔을 뿐이지,
내 자리는 분명히 있을 거라고 누가 그러더라.


조금 느리게 갈 뿐이라고 얘기하는 입술은, 나를 향해 있었고, 언니 자신을 향해 있었다. 소복한 밥과 돈까스를 앞에 두고 우리는 조금 기운을 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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