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든 일이 있으면 기탄없이 꺼내서 감정을 잊는 사람이 있다. 반면 속으로 삭여서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
내 주변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자이고 나는 후자인 편이다. 안 좋은 경험을 입 밖으로 꺼내면 당시의 감정이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그래서 고양이가 꾹꾹이 하듯 감정을 열심히 억누른다. 그러다가 감정이 희석되고 담담하게 말할 수 있는 순간이 오면 그때는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반면 우리 가족은 힘들다는 걸 토로함으로써 힘든 일과 나를 분리하는 방법을 택한다. 위로받고 공감받으면서 위안을 얻고 다시 나아갈 힘을 얻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빈도다.
힘들다는 걸 직장인 아메리카노 빨아들이듯이 말한다면 어떨까? 아무리 이너 피스를 잘 유지하는 사람이라도 언젠간 한계에 부딪친다. 그럴 때 일반적으로는 손절하라는 말을 많이 한다. 나를 위해 관계를 끊어내는 것이다.
하지만 세상 관계가 무 자르듯 쉽게 잘리지 않는다. 그리고 내가 벼려진 칼처럼 숭덩하고 잘라낼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건 아니다. 머리로는 알고 있는데 실천이 안 되는 경우가 부지기수인데 관계 역시 마찬가지다.
마음의 여유가 없는 나는 반복되는 푸념이 달갑지 않았다. 상황을 개선하고 벗어나려는 노력이 보이지 않았다. 말하는 이는 관람차를 타고 있는 것 같이 보인다. 그것도 고소공포증 있는 이가 관람차를 타고 있는 모습과 흡사하다. 시간이 흘러 이내 지면과 가장 가까운 지점에 도달하면 문을 열고 박차고 나와야 하는데 내리지 못하고 다시 높은 곳을 향해 올라간다. 나아지려는 의지가 있는 건가 싶었다.
하소연을 견디지 못하고 불면증을 버티는 사람처럼 시간을 보냈다. 이를 꽉 물고 주먹을 꽉 쥔 채 감정의 토로를 고통 견디듯 지나가길 바랐다. 그러나 나와 달리 언니는 하소연을 무척 잘 들어주고 매번 격려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
최근 일이다. 나는 참다못해 언니에게 물었다.
“안 힘들어? 매번?”
“우리 아니면 말할 사람이 없어.”
그때 뒤통수를 크게 맞은 기분이었다. 내가 얼마나 옹졸하고 자기중심적인 사람인지 다시금 깨달았다. 마음의 여유가 없던 게 아니라 만들고 싶지 않았던 건 아니었을까.
놀이동산에서 관람차를 타면 내릴 순간이 오면 직원이 다가와서 문을 열어준다. 안전상의 이유로 안에서는 열리지 않는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게다가 높은 곳에 다다르면서 감정의 진폭은 커진다. 문이 열린다고 해도 녹초가 되어 나올 수 있는 그 한 걸음의 에너지가 없을 수도 있었다.
유감스러운 마음이 온몸을 덮쳤다. 그날 이후 마음을 고쳐 먹고 들어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단번에 바꿀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한 번 구부리면 아무리 다시 펴도 티가 나는 빵끈 같다. 무딘 칼날의 소유자인 나는 이번에도 머리로는 알고 있으나 실천하지 못한다. 그러나 예전처럼 치밀듯이 화가 나지 않는다.
매번 반복되는 푸념 톡이 밀려오면 가만히 있는다. 언니는 예전과 다름없이 열심히 어깨를 토닥인다. 나는 조용히 읽기만 한다. 더는 고통스럽진 않다. 심리 체력이 저질인 나는 살짝 거리를 두는 걸로 일단은 타협한다. 언젠간 내가 힘을 되찾는다면 그 아이가 관람차에서 내릴 수 있도록 문을 열어주진 못해도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야! 이제 내릴 타이밍이야. 빨리 문 열어달라고 소리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