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할머니는 아들 귀하던 그 시절, 5형제를 낳고도
‘딸 못 낳는 년’이라는 말을 들으며 갖은 시집살이와 핍박을 겪었다.
할머니의 금지옥엽 다섯 손가락.
나는 그들을 속으로 이렇게 부른다.
“개노답 5형제.”
그렇게 귀하게 컸으면서도 감사할 줄 모르는 인간들.
그중 제일이 첫째, 바로 이 몸의 부친이시겠다.
가족관계증명서가 생기기도 전,
이혼숙려기간이라는 말이 생기기도 전에
우리 부모는 갈라섰다.
공교롭게도 내가 태어나자마자였다.
할머니는 부친이 “이혼하고 왔다”는 사실을
우유 사 왔다는 말처럼 너무 산뜻하게 해서
그 말 자체가 황당하게 들렸다고 했다.
귀하디 귀한 대우를 받아서 그런지 부친은 낭비벽이 있었고 멈출 줄 모르는 사업 시도를 했다. 집은 결국 빨간 딱지로 물들었고 본인 동생들의 이름에도 빚을 남겼다. 그러면서도 고고함을 떨치지 못한 채 자존심만 세서 가족들에게 전혀 미안해 하지 않았다.
아무튼 그렇게, 이혼이 흠이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이혼한 나의 부모에게는 책임감도 없었다.
부친이 나타나면 집에 있던 돈은 모조리 사라졌다.
부친의 여자친구들, 즉 새엄마 후보들은 계속 바뀌었다.
엄마에 대한 기억은 전혀 없다.
재혼 후 자살했다는 이야기만 전해 들었다.
고3 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부친에게 말대꾸를 했다. 그날 나는 얼굴에 피떡이 되도록 맞았다. 소주병을 거꾸로 들고 때리러 오는 걸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막아세웠다. 이 사건을 계기로 부친과 나는 완전히 손절했다.
그렇게 나의 부모는 자연스럽게 소멸했다. 부모라는 단어만 둥둥 떠 있을 뿐이었다. 나의 실질적인 보호자는 할머니였다.
개노답 형의 본을 받아 다섯째인 막내 삼촌도 이혼을 했다. 그리고 할머니에게 지영이를 맡겼다.
그때는 ‘경계선 지능’이라는 개념을 몰랐다. 지영이는 어딘가 조금 느린 아이였다. 첫째 아들의 첫째 딸과 어딘가 모자란 막둥이의 딸 사이에서 나는 맹랑하고 말대꾸 잘하는, 손 많이 가는 손녀였다.
둘 사이에 낀 독특한 내 위치와 성격을 고려하면 할머니는 나를 눈엣가시로 여겼는지 모른다. 지금 생각해 보면 본인의 분노를 받아낼 수 있는 샌드백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할머니에게 나는 애정보다는 꾸중을 더 많이 들었고
매도 많이 맞았다.
옷걸이, 선풍기, 공장에서 주워 온 쇠막대기 같은 것들로 여기저기를 맞았다. 때린다고 맞는다고 기죽지 않았다. 나는 내 기준에 맞지 않으면 몇 번이고 다시 대들었다. 그래서 할머니는 나를 때리고 혼내는 데 더욱 거침이 없었다.
그 집에는 늘 누군가의 화풀이가 필요했던 것 같다. 할머니 역시 할아버지의 샌드백이었다. 할아버지는 할머니에게 상습적으로 욕을 했고 때리기 일쑤였다.
가정폭력과 비속어가 난무하는 삶이었다. 그런 집에서 나는 또래보다 말이 늦었다. 그런데 말이 트이자 이번에는 말이 많다며 시끄럽다고 했다. 초등학교 때까지 화장실을 가리지 못했고 학교에서 바지에 실수를 한 적도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양육 환경 문제였던 것 같다. 다만 나에게는 시간이 있었고 지영에게는 세상이 너무 빨랐다.
기초생활수급자. 아니, 그 당시에는 생활보호대상자였다. 국가가 인정한 가난한 사람. 그것이 우리였다.
생활보호대상자였지만 경제권은 모두 할아버지가 가지고 있었다. 할머니는 남의 명의를 빌려 청소부 일을 했다.
그리고 중간중간 나타나는 돈 쓸어가는 청소기 한 명.
바로 부친이었다. 할머니에게만 귀한 존재였던 그의 등장은 우리의 위태로운 삶을 늘 뒤흔들곤 했다.
그래도 ‘독한 년’이라는 할머니의 평가에 걸맞게
나는 꽤 악독하게 학창 시절을 버텼다.
교수용 자습서를 얻어다 공부했고 따돌림도 이겨냈다.
나를 괴롭히는 애들은 내가 합격한 대학 이름으로 다 짓뭉개 주겠다는 각오 하나로 3년을 버텼다. 동기는 불순했지만 결과는 나쁘지 않았다. 나는 꽤 만족할 대학에 진학했다.
그 뒤로는 아르바이트와 학업의 쳇바퀴 속에서 살았다. 입학 후 잠깐, 나의 처지를 잊고 동아리도 해보고 친구도 사귀어 보려고 했다.
그냥 포기했다.
모두 돈이 들기 때문이다.
한편, 우리가 성인이 되고 나서야 할머니의 몸이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파스로 견디던 몸은 견디지 못했다. 이유 없이 설사를 하고 쉼 없이 토했다. 맥을 가누지 못해 구급차를 부르는 일도 있었다. 기력이 없어 입원하는 일도 잦았다.
모처럼 방학을 맞아 아르바이트를 빡세게 해서 돈을 벌어 두고 싶을 때. 취업 대비 공부를 하려고 계획을 세웠을 때.
운명은 꼭 그때마다 우리를 비웃는 것 같았다.
너희가 아무리 보통의 옷을 입으려고 안간힘을 써도
보통이 될 수 없다는 걸 알려주는 것처럼.
할머니는 방학 때, 휴학 때마다 입원했다. 간병인을 쓸 돈이 없었다. 그래서 언니가 간병의 메인을 맡고 내가 보조를 했다. 대소변을 받는 언니를 보고 다른 환자들은 효녀라며 눈물겨워했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었다. 돈이 없어 간병인을 못 쓰는 게 더 쪽팔렸다는 걸.
개노답들은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꼭 이런 말을 남겼다.
“할머니가 너희를 키워주셨으니까.”
그리고는 나타나지 않았다.
고관절 골절로 할머니가 입원했던 날 밤, 우리는 밤을 꼴딱 새웠다. 그리고 나는 그대로 출근했다.
멍한 얼굴의 신입을 보고 상사는 뭐가 그리 고까웠을까. 대리님은 나를 따로 불러 혼을 냈다. 자존심이 상했지만 결국 말해 버렸다.
“새벽에 할머니가 다치셔서 응급실에 있다 왔습니다.
밤을 새서… 죄송합니다.”
나는 ‘보통’이 되고 싶어서 안간힘을 썼다. 20대 초반에 읽었던 자기계발서들처럼 나도 노력하면 반드시 될 거라고 믿었다. 그래서 도전하고 넘어지고 또 넘어졌다. 하지만 한 가지를 간과했다.
그들과 나의 출발선이 다르다는 것.
심리적 기반이 다르다는 것.
업종을 바꾸며 이직을 서슴지 않았다. 안 맞으면 새로운 옷을 입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마지막 회사를 다닐 무렵, 내 몸도 망가지기 시작했다. 불면증이 생겼다. 잠을 이루지 못했고 새벽 두 시에 깨서 두세 시간을 울다가 다시 잠들었다. 폭식과 절식을 반복했다. 길에서, 회사 화장실에서, 자리에서 모니터를 보다가도 계속 훌쩍였다. 그렇게 몇 달을 버티다 결국 병원을 찾았다.
우울증 진단을 받았다. 그리고 몇 달을 더 참다 회사를 그만두었다.
그리고 할머니는.
우리의 방학과 휴학 기간에 맞춰 입원하던 것처럼.
내가 퇴사하자마자 폐암 진단을 받았다.
언니는 회사를 다니고 있었고
지영이는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시간이 가장 유동적인 사람 한 명이
전담을 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했다.
누구도 나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삼각형이었고,
지금 필요한 도형도 삼각형이었다.
그래서.
나는 할머니의 보호자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