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만해서 주면 나머진 언니가 할게.”
“응! 잠깐만, 그면 내가 방에 가서 하고 갖다줄게.”
지영이 종종걸음으로 자기 방으로 돌아간다.
웬만해선 지영을 붙잡고 같은 말을 수 없이 반복하면서도 직접 처리하게끔 하지만 가끔은 설명해도 소용이 없을 때, 나조차도 설명하기 어려운 그런 일들은 내가 대신해준다. 예를 들면 연말정산이나 국민연금 가입, 건강보험료 납부 등등.
우리집에선 “이해됐어?”, “이해했어?” 묻는 게 당연하다. 스마트폰에 여자 둘이서 달라붙어 씨름을 하는 것도 익숙한 그림이다.
지영의 지능은 보통보다 조금 밑돈다. 그렇다고 지적장애 수준은 아니다. 한글도 산수도 어느 정도 할 수 있다. 스마트폰도 꽤 잘 쓴다.
얼마나 이해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웹소설을 좋아해서 카카오페이지나 네이버시리즈 로맨스 판타지를 자주 본다. 단순 작업도 몇 번을 반복해서 알려주면 곧잘 따라한다.
지금은 “경계선지능”으로 지영을 분류할 수 있지만 예전에는 감각으로 느낄 뿐이었다. “말귀를 못 알아 듣는다.”, “느리다”, “모자르다.” 가끔 짜증나면 “바보“ 정도로 생각하곤 했다. 본인도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지만 설명할 수 없는 그런 순간도 많았다고 한다.
명명할 때 의미를 찾고 이해를 할 수 있는 것처럼, 우리가 지영이에 대해서 더 심도 있게 이해할 수 있게 된 건 4년이 채 못된다. 남들과 다른데 형언할 수 없는, 미묘한 격차.
지영이 초등학생이 되었을 땐 2살 위인 내가 같이 다니면서 숙제와 글씨를 알려줬다. 성격이 모난 나의 기질은 여기서도 드러나는데 대충 설명하거나 한 번에 못알아 들으면 인상을 팍 쓰며 툴툴거리기 일쑤였다.
“아 됐어. 내가 할게”
이런 위계관계는 때로는 갑질로 작용하기도 했다. 너그럽지 못한 언니인 나는 지영이가 갖고 있는 장난감에 눈길이 가면 습관적으로 이런 말을 했다.
“그거 나 주면 안돼?”
“내 건데...”
“그럼 공부할래?”
공부가 싫은 지영이는 마지못해 인형을 나한테 주곤했다. 치기어린 강탈과 협박, 이것 또한 일상이었지만 지금은 후회하는 일중 하나다. 그래서 지영이 나한테 화난 얼굴을 하거나 내 심한 장난에 표정이 굳으면 어쩔 줄 몰라하며 사과하기에 바쁘다. 항상 시니컬하게 구는 내가 전전긍긍하며 애먹는 내 모습을 보며 언니는 웃음을 삼킨다.
한글과 맞춤법, 산수를 모르는 내 동생. 고등학생이 되어 겨우 한글을 뗄 수 있었다. 시험지에 항상 비가 내렸는데 문제와 답을 알려준 서술형을 맞춰오는 기적 같은 일에 언니와 나는 지영이를 칭찬하느라 입이 마르지 않았다. 물론 의미를 이해한 게 아니라 그냥 글자를 외운 것뿐이지만.
그리고 지영이는 성인이 되어 바로 취업전선에 뛰어들었다. 콜센터에 지원했지만 말이 어눌해서 하루만에 포기하기도 했고 사무직을 지원했지만 단어를 이해를 하지 못 했다.
여러 곳을 전전하던 지영이가 편의점에 자리를 잡을 시기에는 나도 공부와 아르바이트, 직장으로 많은 신경을 써주지 못했다.
‘내 코가 석자인데 지금 누구를 신경 써’의 수준을 넘어 아예 내 관심 밖의 영역에 있었다. 나도 내 우울증, 항암치료로 지친 할머니의 짜증받이 역할을 수행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러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지영이는 바로 나와 같이 살았다.
“지영은 은율언니랑 사는 거야. 알았지?”
할머니 장례식장에서 우리 셋이 나눈 이야기. 지영에게 선택지는 없었다. 혼자 살 수 없을 것이라는 암묵적인 모두의 동의. 그저 길이 난대로 물이 흐르는 것처럼 지영이와 할머니가 단둘이 살던 집에 내가 살림을 챙겨 들어갔다.
초등학생 시절의 갑질, 스스로가 인식한 성격의 모남과 다혈질적인 기질. 성급함. 이것들은 이번에는 만회하리라. 그것이 나의 다짐이었고 지금도 유효하다.
설령 같은 설명을 다섯 번 넘게 하더라도 필요한 건 반드시 설명한다.
“이해했어?”
“응.”
“진짜 이해했어? 한 번 더 설명해줄까?”
이해했는지 최종 점검은 필수. 화는 절대 내지 말 것. 어려운 일일 수록, 설명이 복잡할 수록 지영 또한 얼굴이 시뻘개지며 자신을 답답해하기 때문이다. 본인이 자신에게 화내는 것 어쩔 수 없더라도 적어도 나만큼은 총부리를 겨누지 않으려고 한다.
사실 우리는 지영이를 장애인으로 등록하려고 시도했다. 할머니 생전에 몇 번 이야기 했다가 ‘장애인’이란 단어에 질겁하고 눈물을 흘리는 태도에 우리는 말을 삼켰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는 장애등록을 위해 검사와 서류를 준비했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회신이 오지 않았다. 심사 결과가 오래 걸리는 게 좋은 의미라는 인터넷 글을 찾아 읽으면서 희망을 낙관했지만 우리는 장애인의 영역에 들어갈 자격을 얻지 못했다.
지능지수는 지적 장애와 2점 정도 차이나고 사회적 지능이 높다는 이유였다. 지영이 자라면서 얻은 눈칫밥, 남들과 똑같아 보이고자 아등바등한 노력이 발달하면서 장애가 장애가 아닌 게 된 건데. 이게 마냥 좋은 걸까.
격차를 좁히려는 노력을 안 하고 방관한 건 아니었다. 어렸을 때 할머니는 지영이를 데리고 대학병원에 몇 번 갔다. 옛날 사람이지만 미묘한 차이를 느꼈기 때문이리라. 그때 골든 타임을 놓치지 않았더라면, 그때 우리가 조금 더 신경을 써줬다면 어땠을까 하는 가정이 잊을만 하면 떠오른다.
내가 바라는 건 하나였다.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때, 사회적으로 보호받을 수 있는, 그 “확실한” 복지의 영역에 내 동생을 놓고 싶다.
말을 직설적으로 하고 기가 죽더라도 할말은 하자는 나와 달리, 사람에 치이고 스스로에게 자신이 없는 지영과 같이 살면서 많은 조율 과정이 있었다.
내가 기침을 하면 물을 떠서 달려왔다.
“지영아, 언니 기침한다고 물 안 떠와도 돼. 언닌 할머니가 아니야. 안 죽어.”
한 번은 내가 억지로 교육 프로그램을 신청한 적이 있었다. 가방을 들고 죽상을 하며 얼굴만 시뻘개져 있는 동생. 표현하는 법보다 참는 법이 익숙한 동생에게 짜증 섞인 말로 말했다.
“야! 가지마! 싫으면 가지마! 그리고! 싫었으면 처음부터 싫다고 했어야지. 이제와서 왜 그런 표정 짓냐? 그리고 우리 같이 오래 살 거거든? 속에 담아두지 말라고 몇 번이나 말해. 그냥 말하라고 싫으면 싫다고,”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지금 지영은 나에게 말대꾸도 잘하고 적어도 내가 느끼기엔 나를 편하게 여긴다. 그래서 우리는 거리낌 없이 속이야기도 터놓고 한다.
“넌 언제 죽고 싶어?”
“난 언니랑 같은 날, 같은 시간에.”
“아니 난 싫어. 난 너보다 1시간만 더 살 거야. 내가 다 확인해야지 마음이 편할 것 같아.”
생각없이 던진 질문에,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한 적 없으면서 이런 말이 튀어나온다. 뱉고 보니 또 사실이다. 항우울제를 먹은지 이제 6년, 죽음에 대한 이야기나 삶의 허무함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나누는데 적어도 지영이보단 1시간, 아니 1분만 오래 살고 싶다.
“우리 지영이 ‘외돌토리’ 될 까봐”
할머니는 알까, 당신의 생각이 기우에 불과했다는 것을. 내가 얼마나 많은 시간과 감정을 들여서 내 동생을 보호하려고 하는지를.
단춧구멍을 뚫어주는 일. 지영이 입어야 하는 사회적 옷에는 단추가 많은데 단춧구멍이 없다. 나는 내 나름의 설명과 지식, 쉬운 단어를 총동원해서 그 옷에 작은 구멍을 뚫는다. 어떤 단추라도 끼울 수 있게.
그래서 아이가 세상이라는 험난한 곳에
작은 가디건이라도 하나 더 챙겨입기를.
나는 오늘도 그렇게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