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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율냥 Dec 11. 2019

행복까진 바라진 않거든요

2019년의 끝무렵이다. 중간에 있을 땐 감흥도 없다가 항상 이렇게 끝과 시작의 교차점에서 뒤를 돌아보는지 모르겠다. 크게 의미도 없는데 말이다. 올초에 세우는 나의 계획은 건강관리와 체중 감량, 책장 정리, 자격증 취득이 주였다. 연말 정산 느낌으로 계획을 체크해보면, 독립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책장을 정리했다. 이후 홀로 살게 된 사람이 그러하듯 식욕을 이긴 귀차니즘에 살이 좀 빠졌다. 아주 소폭의 체중 감량 오케이. 몸에 각종 염증이 도지면서 병원 신세를 지고 있다. 이렇게 건강 관리까지 하고 있다. 자격증은 한 개도 따지 못했다. 공부를 좋아했던 그 아이는 어디로 사라져 버린 건지 모를 일이다.


계획을 조금 세웠기 때문에 달성률이 제로는 아니다. 그럼 그 외에 무엇을 이루었나. 나라는 한 사람이 사는 곳을 책임 지고 관리하는 능력을 배양하고 있다. 양육자의 관심과 사랑, 알지 못했던 가사 노동의 어려움을 체감하고 감사를 느끼고 있다. 가계부를 쓰면서 생각보다 더 1에 수렴하고 있는 엥겔 지수를 알게 되었다. 식구들과 살 땐 옆방에서 들려오는 티브이 소리에 항상 귀를 기울이고 내가 가만히 있어도 여러 자극 속에서 위안을 얻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내가 내지 않으면 무소음의 상태에서 나란 사람을 뒤돌아 볼 수 있게 되었다. 생각보다 나약하지만 생각보다 강하고 싸가지가 없다는 걸 알게 된 시점이랄까.


나와 남을 위한 할부 요정이 되었다. 할머니의 병원비를 과감하게 결제하고 자식 도리 안 하는 그놈의 아들들에게 당신들 손 벌리려 연락하는 거 아니니까 와서 인사는 하라고 언니 입을 빌려 호통을 쳤다(가부장적 집안에서 둘째의 지랄발광보다는 첫째의 근엄한 한 마디의 위력이 훨씬 크다). 에어 팟도 사고 아이패드 키보드도 사봤다. 의도는 아니었지만. 아무튼 열심히 기기를 사서 음악은 열심히 듣고 효율은 좋지 못하지만 이렇게 글을 끄적이고자 노력하고 있다. 장인은 도구를 가리지 않는다던데 나는 장인이 아니기 때문에 열심히 도구를 가린다. 편하고 좋은 걸로. 사기 전에 주머니 사정을 산수 해보고 나서 이 정도의 마이너스는 투자야 하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글을 쓰려고 노력할 때마다, 정말 시도할 때마다 나를 치는 일들이 굉장히 많이 있어서-나중에 꼭 정리해야지-, 글을 쓰지 말라는 운명이 아닐까 싶을 정도의 수준까지 왔다. 그래도 나는 포기하지 않는다.  규칙적으로는 못써도 마음속에는 항상 글을 쓰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이렇게 다시 몸이 허락하면 끄적이는 것이다. 조악할지라도.


12월엔 참다못해 터져 버린 감정 쓰레기통을 현대 의학의 힘을 빌려 고치고 있다. 남의 감정 쓰레기통도 깜냥이 있는 사람이 해야 된다는 걸 절실히 느끼고 있다. 그와 별개로 내면을 다지기 위해 노력 중. 좋아하는 책을 읽으며 내면의 근육을 키워나가고 있다. 좋아하는 빵이나 마카롱을 먹거나 초콜릿을 먹거나 폭세틴을 먹거나 알프람정을 먹거나.


인생은 계획대로 되지 않지만 또 지금 이렇게 돌아보니 계획 외로 해내고 있는 것들이 보인다. 아무튼 나는 해내고 있다. 한없이 나락으로 떨어질 것 같을 때도 있었고 내가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해낼 것 같은 전능감에 휩싸이는 찰나의 순간도 있다. 기복이 심하지만 꾸물꾸물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내년에는 서른한 살. 이제 시속 31km의 속도로 1년을 보낼 텐데. 느릿느릿 가면서 모든 것을 다 찬찬히 보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면 내게 주어진 삶의 속도에 순응하면서 스쳐 지나가는 것들을 눈에 박고 마음에 박아야지. 그럼 행복하진 않더라도 괴롭진 않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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