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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율냥 Dec 15. 2019

귤 한 박스

귤의 계절이 왔다. 칼로 깎는 수고로움도 손에 즙이 묻어 닦아야 하는 번거로움이 없는 과일. 살고 있는 집 앞에 있는 마트에서 한 봉다리에 삼천 원에서 오천 원 정도 하는 걸 보고 인터넷으로 한 박스를 시켰다. 만 원이 채 되지 않는 돈에 15kg. 생각보다 많고 생각보다 묵직했던 귤들. 수일의 점심과 군것질을 귤로 해결했다. 며칠 전 귤 박스를 열어보는데 희끄무레한 것들이 보인다. 곰팡이가 난 것들을 꺼내서 싱크대 한쪽에 뒀다. 일요일 외출 후 귤을 보니 바구니에 덜어놨던 것에도 곰팡이가 보였다. 설마 하는 마음에 박스 안쪽에 있던 귤들을 만져보니  무르고 곰팡이 난 것들이 더 많이 보였다. 곰팡이 특유의 뿌연 느낌의 향도 난다. 아뿔싸 하는 마음에 귤을 모두 꺼냈다. 냉장고에 넣을 수 있는 만큼 넣고 나머지는 작은 상자, 쟁반, 창가 등등 둘 수  있는 곳에 귤을 일렬로 늘어놓았다. 곰팡이 핀 것, 무른 것들을 골라내서 책상 위에 올려두니 이걸로만 해도 한 봉다리는 된다. 위에서 볼 때는 멀쩡해 보였지만 안쪽에서 눌린 귤들이 심각했다. 음식물 쓰레기 봉지 하나를 귤로 채웠다. 일부라도 건지고 싶은 마음에 과도를 꺼내 잘라보고 껍질을 까 보는데도 대부분은 버렸다.


귤을 정리하면서 문득 마음에 대한 생각이 들었다. 처음 곰팡이를 발견했을 때 꺼내고 해결했더라면 번지지 않았을 텐데. 겉에서 쉽게 발견할 수 없기 때문에 안에서 생채기가 곰팡이가 되고 옆에 있던 추억마저 곰팡이에 짓무르게 만들어 버렸다. 부정적인 감정, 과거의 상처들을 안고 있을수록 괴로운 건 나 자신. 다급하게 귤을 꺼내고 솎아내는 작업을 했던 것처럼 내 마음의 가지치기를 해야 부정적인 감정에서 해방된 오롯한 나를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 일단 괴롭더라도 상처를 끄집어내는 것 그리고 과감하게 결별을 선언하는 것만이 마음의 곰팡이에 귤을 송두리째 잃지 않는 유일한 방법이란 생각이 든다. 반토막 남은 귤, 흐물거리는 귤을 한입에 넣으며 남은 귤만은 버리지 않고 다 먹자는 다짐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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