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를 도피하는 글쓰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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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매일 실패한다. 스마트폰 안 보고 공부하기, 운동과 다이어트, 금연, 저녁 단식. 그리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기. 기필코 오늘은 7시에 일어나겠다고 다짐했지만 10시에 일어나 가수면 상태로 카카오톡 답장을 보내고 다시 잠들었다. 진짜 잠에서 깬 건 11시 40분이었다.
누구나 매주 실패를 한다. 로또 1등 당첨이 성공이라면 2등부터 낙첨된 사람 모두 실패자다. 불행 올림픽의 개막이다. 실패를 주제로 글을 쓰다니.
1. 도망의 역사
나는 공부를 곧 잘했고 시험 운도 좋은 편이었다. 공교육의 노예다웠다. 하지만 공노비와 사노비가 다르 듯 사교육, 특히 스펙을 쌓는 분야엔 젬병이었다.
시작은 토익이었다. 시험 일자를 잡아두고 공부하면 효율이 높을까 싶었다. 접수를 하고 인강을 열심히 돌렸다. 공부하지 않은 것도 아닌데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 객관식이라서 일단 찍으면 되는데 그 당시엔 그 생각을 못했다. 가지 않았다. 그 후 두어 번을 토익 주관사에 기부하고 세 번째 돼서야 시험장에 택시를 타고 갔다. 늦잠 자서. 점수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약 200점 높게 나왔다. 과정은 찜찜했지만 결과는 만족스러워서 위안을 삼았다.
두 번째는 JLPT였다. 일 년에 두 번밖에 없는 시험이다. 상반기에 N3를 접수하고 가지 않았다. 공부는 계속했다. 하반기에 N2를 접수했다. 역시 가지 않았다.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아서. 그다음 해 상반기 N1를 접수하고 합격 통지서를 받았다. 이 역시 결과는 좋았지만 과정이 영 신통치 않았다. 모든 자격증 시험(JPT, 한국사, KBS, 한자, GTQ 등등)에서 한두 번은 기부천사를 자처했다. 결과는 목표했던 점수, 합격이지만 과정 때문에 합격하고 나서도 기분이 좋지 않았다. 역시 사람에겐 과정과 결과 모두 똑같이 중요하다. 떨어질 거라는 두려움에 일부러 미응시를 택한 거다. 선거에서 낙선을 예상하면서도 입후보하는 사람의 패기가 나에게는 없었다.
2. 차선의 역사
나는 2라는 숫자를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잊을만하면 한 번씩 1이 아닌 2, 두 번째가 되거나 차선을 택하곤 한다. 채용형 인턴을 했을 때 정규직 전환은 1명이었다. 서류전형, 면접전형으로 인턴으로 뽑고 6개월 뒤에 다시 인적성을 보고 면접을 보고 발표를 하고 고득점자 1명을 정규직으로 전환했다. 인적성 공부를 하고 면접을 보고 인턴 기간 활동을 PT 했다. 이럴 거면 애초에 서류랑 면접은 왜 본 건지 싶을 정도로 빡빡했다. 원래 1명만 전환이었는데 TO가 나서 2명을 전환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결과 2등이었던 나는 정직원이 되었다.
2년 뒤, 묵혀놨던 편집자의 꿈이 다시 싹텄다(지금이라면 농약 쳐서 다 없애버려야 할 꿈). 일본어 전공을 살려 만화 출판사를 다니고 싶었는데 기회가 닿지 않았다. 시야를 넓혀 일본어 전공만 살리는 방향을 타협했다. 때마침 일본어 교재 출판사에 지원했다. 일본어 작문 시험을 보고 구술 테스트를 했다. 아쉽게 떨어졌다. 며칠 뒤 출판사에서 연락이 왔다. 실용서팀에서 채용을 하는데 그쪽에 지원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실용서 팀장님과 면접을 보고 그날로 채용이 확정됐다. 코바늘 책과 요리책을 편집하면서 코바늘도 배우고 대바늘도 배우고 요리 공부도 했다. 내가 만드느니 사서 쓰자, 사 먹자주의였지만 열심히 배웠다. 집에는 비슷한 크기의 코스터가 가득했다. 어느 날, 처음 지원한 부서 팀장님은 1순위 합격자가 합격을 포기해서 2순위인 나를 다시 부르고 싶다며 아쉬워했다. 나는 또 2등이었구나. 하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몇 개월이 지났을까. 새로운 지식을 아는 즐거움은 컸지만 뭔가 아쉬웠다.
이후 만화 출판사 공고가 떴다. 지인이 링크를 보내줬다. 이번엔 정말 하고 싶은 걸 해보자는 마음에 지원했고 면접을 봤다. 내가 봐도 대답을 잘한 느낌이 들어서 기분이 좋았다. 오늘 말빨 좀 사는데. 며칠 뒤 메일이 하나 왔다. 지원한 부서보단 옆 부서에 더 잘 맞을 것 같아 그쪽 편집장님이 미팅을 요청했다고. 아, 또 이러네 싶었다. 내가 원하던 부서가 아니라 항상 그 옆이다. 같은 회사니까 괜찮겠지라는 생각으로 미팅을 수락했다. 막상 가니 미팅이 아니라 다시 면접을 봤다. 미팅의 뜻을 잘 모르는 걸까. 아무튼 면접을 보고 합격해 회사를 다녔다.
3.
그 결과 지금은 백수가 되어 손가락 관절을 자극하며 방에 짱 박혀 글을 쓰고 있다. 나는 45도 꺾어 갔는데 결과적으로는 180도 꺾인 결과가 나왔다. 로또 1등 같이 격변하는 게 아니라면 차선은 최선이 되지 못하니 타협하지 말자는 결론을 얻었다. 하지만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이 글도 도피하기 위해 쓰는 거다. 오늘치 써야 할 글이 있는데 막막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