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를 도피하는 글쓰기 3
회사를 관둔 지 이제 21일이 되었다. 마음은 벌써 6개월이 지난 것 같아서 불안에게 쫓기는 기분이다. 그동안의 생활 패턴을 정리하자면, 매일 걸음 수는 착실하게 줄어들어 평균 1,000~2,000보를 왔다 갔다 한다. 2,000보 내외의 걸음은 동네 산책에 대부분 할애한다. 그 결과 집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스타벅스 드라이브 스루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고, 정말 부자들이 사는 집 구경(정확히는 외관 구경, 옥상에 수영장이 있는! 수영장 손잡이가 보였다!)도 하고, 빨고 처음 쓴 모자에 새똥도 맞았다. 교통비는 한 달 기준 8천 원을 넘지 않는다. 본가 갈 때도 걸어가고 멀리 마실 나갈 일이 별로 없다.
오전 10~11시에 일어나서 씻고 그때부턴 노트북 앞에 일단 앉고 본다. 자취를 처음 시작했을 때 이 방은 작업실로 만들 거라며 호기롭게 말했는데 본의 아니게 작업실이 되어 가고 있다.
하지만 이번 주말은 평소와 달랐다. 본가에 갔는데 우리 집은 모두 나와 달리 부지럼뱅이(?)들이라서 기상시간이 빠르다. 그 덕분에 일단 9시에 일어났다. 20일 만에 처음으로 한 자릿수 시간에 일어난 터라 커피를 두 잔 연거푸 먹어도 졸음이 가시지 않았다. 커피를 먹고 나서 평소 귀찮아서 챙겨 먹지 않는 호화로운 일상식(흑미밥, 김치 등)을 먹었다.
10시 반엔 집을 나섰다. 지인과 김보희 작가전에 가기로 해서 11시 반까지 안국역에 가야 했다. 카페인의 효과는 대단했다! 졸음은 해결하지 못하고 눈에 핏발만 서게 만들었다. 올해 거의 처음이다시피 한 미술관 나들이를 하고 메밀국수를 먹고(하지만 졸려서 먹는 둥 마는 둥...) 산책을 하다 집에 왔다. 퇴사하고 비타민D 합성을 가장 많이 한 날 아닐까.
잠깐 딴 이야기를 하자면, 김보희 작가는 이번에 처음 알게 된 작가다. 다른 건 잘 모르겠고...(정말)
이름에서 '희'를 주로 HEE로 표기하는데 작가는 HIE로 썼다. 지인에겐 예술을 하려면 '희'자를 저렇게 표현해야 하는 거냐며 나도 이번 기회에 바꿔야겠다며 우스갯소리를 했다. 아무튼. 제주도의 풍경, 바다, 꽃 다채로운 그림들이 무척 인상 깊었다. 그중 키우는 개를 작품으로 그린 것이 있었다. 본인 이름이 대문짝만 하게 쓰인 작품집 커버가 작품 요소로 등장하기도 한다. 작품 안에, 본인 이름이 표지로 쓰인 작품집을 요소로 이름을 넣는 기분은 어떤 걸까? 또 하나. 50년 동안 그림만 그려왔다는 점이 대단하다. 50년을 버틸 수 있는 정신과 체력. 나는 가능할까? 이러면서.
이런 까닭으로 오늘은 평소의 5배에 가까운 걸음을 걸었다. 무려 만보를 넘게 걸은 것이다. 하지만 평소 사이클과 달라서 그런지 온몸과 신경이 곤두서기 시작했다. 오늘 목표치를 채워야 하는데, 토요일마다 발행하는 편의점 수난기는 어떡하지, 나는 왜 이렇게 조급하지, 너무 졸려 등등.
항상 뭔가를 해왔고 해야 한다는 생각이 너무 커서 지금 나를 기다려주지 못하는 게 조금 아쉽다. 결과를 내야 한다는 압박감을 스스로 확대 재생산하고 있는데 이 생각은 내가 글을 쓸 때 조금 사그라든다. 주변에선 나를 많이 다독여주는데 내가 나 자신을 못 믿으니까 계속 쳇바퀴 돌 듯 같은 패턴이 반복된다. 내 성격 상 내가 확신이 서면 남들이 만류해도 들이밀고 보는데 이번엔 확신이 부족해서 그렇다. 주위 사람들한테 많이 미안하다. 의사 선생님한테 말하면 또 혼날 게 분명하겠지.
자취방에 돌아와 씻고 다시 노트북을 켰다. 몇 페이지 끄적이다가 개떡 같은 문장, 묘사 부족 등등으로 셀프 피드백을 하다가 나가떨어졌다. 다시 초심을 생각해, 너 그때 너무 힘들었어, 맞아 나 그때 진짜 너무 죽을 것 같았어, 그때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부정적인 추동뿐이지만). 이런 자기 대화를 하다가 다시 한글 프로그램으로 눈을 돌린다.
이걸 쓰는 것도 오늘치 목표치를 못 채웠고 저녁 10시부터 글을 쓰기 시작하는데 계속 딴짓하고 진도를 못 빼고 있어서 위안을 삼으려고 썼다. 어쨌거나 퀄리티는 떨어지지만 나는 글을 썼고 기록을 남겼다는데 의의를 두면서 나 자신을 합리화하고 다독이는 거다.
로또, 투고, 컨택 등.
다들 기회가 오는데 내 차례는 아직 오지 않았다.
빨리 오렴. 다만 혼자 오지 말고 돈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