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를 만나기만 했더라면 무조건 사랑했을 것이다.
내가 존경하는 은다 아메데 씨처럼 좋은 포주가 되어 엄마를 돌봐주었을 것이다.
로맹 가리, <자기 앞의 생> 中
그날은 날씨가 무척 화창했다. 평소처럼 언니와 사이좋게 걸어다가 서로 말꼬리를 잡고 길에서 티격태격 한바탕 했다. 우리의 싸움은 편의점에서 파는 뜨거운 캔커피 같다. 겉은 잡기 겁날 만큼 뜨겁지만 내용물은 미지근하다. 쉽게 싸운 만큼 화해도 빠르다.
"우리 오늘 같은 날까진 싸우지 말자. 미안해."
"나도."
평소와 마찬가지로 언니가 먼저 손을 내민다. 할머니는 어렸을 때부터 항상 둘이 싸우면 언니가 먼저 화해를 한다고 화를 내셨다. 너는 언니가 먼저 사과하고 나서야 겨우 '나도'라고 짧게 말한다며, 미안하단 말에 야박하다고 분통을 터트리시곤 했다. 옛날 생각에 말을 보탠다.
"언니, 나도 미안해."
보험회사는 몸과 마음이 아픈 사람들이 오는 점에서 병원이랑 똑같다(보험 사기도 일단은 건강한 건 아니니까). 쾌적하고 깔끔한 인테리어. 보험사도 보험 수익자도 자주 만나봤자 좋은 일이 없는데 왜 이렇게 해놓은 거지. 보험사는 돈 내주기 싫을 거고 보험금을 타려면 대다수 불행한 일이 일어나야 하니까 피차에게 안 좋은 거 아닌가. 근데 왜 이렇게 잘해놓은 걸까. 보험회사를 혐오시설로 여겨야 하는 건 아닐까.
몇 년 전, 우편이 두 개 왔다. 하나는 언니, 하나는 내 앞으로. 가벼운 종이 두 장이 우리 집을 눈물바다로 만들었다. 자동차도 없고 국민건강보험 외에는 보험의 비읍도 모르는데 00화재 자동차보험이었다. 약관 같이 보기 싫은 안내문을 넘기는데 낯익은 이름과 대략 600만 원(두 종류의 항목으로 300만 원, 330만 원 이런 식이었다.)을 준다는 내용이었다.
손이 부들부들 떨려서 던져버린 안내문을 찬찬히 읽었다. 법이 개정되어 돈을 준다는 내용인데 그 안엔 ‘XX’이라는 단어가 있었다. 나는 엄마가 언제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모른다. 매장했는지 화장했는지도. 엄마의 목소리는 기억도 나지 않는다. 초등학생 때 엄마가 사준 개나리색 털모자만이 엄마의 상징처럼 남아있다.
처음 들은 건 파리한 형광등이 점멸하는 독서실 휴게실에서였다. 조심스럽게 말하는 언니가 답답해 재촉하기만 했다. 엄마가 자동차 사고로 돌아가셨다는 말을 듣고 생각보다 타격이 없어서 놀랐다. 나는 참 매몰차고 냉정한 인간이구나.
애써 외면했는지도 모르겠다.
엄마 이야기를 하면 가족관계증명서를 빼놓을 수 없다. 가족관계증명서를 뗀 날, 나는 드디어 엄마의 주민등록번호를 알게 되었다. 아빠 엄마의 나이 차도 알게 되었다. 두 사람은 여섯 살 차이였군.
또 시간이 흘러 다시 가족관계증명서를 뗐을 땐 부모 이름 아래 표 하나가 추가되었다. 친권이 아빠한테 갔다가 내가 성년이 되어 상실됐다는 식의 내용이었다. 아빠로부터 자유로워졌다. 친권에 대해선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고, 몰랐던 사실이지만 괜한 해방감이 좋았다. 친권 내용이 덧붙여지면서 남들 한 장 이면 되는 가족관계증명서가 나는 두장이냐 이런 생각도 들었다. 앞뒤로 넘겨보다 순간 엄마의 이름 옆에 ‘사망’이라는 단어가 보였다. 전에는 없었던 단어 같았는데 그때서야 눈에 들어왔다.
너무 놀란 나머지 언니에게 사진을 찍어 카톡을 보냈다. 일개미들이 으레 그렇듯 회사에서 갖은 보안 프로그램을 깔고 프린트를 했던 터라 화장실로 뛰어갔다. 그때 눈물이 났던 이유는 지금도 모르겠다. 구두로만 듣다가 활자로 봐서 시각이 놀란 걸까. 법이라는 제도가 의사봉으로 땅땅땅하고 알려줘서 그런 걸까.
알고 있는 사실을 보험사 우편과 가족관계 증명서로 본 것뿐인데 뭐가 그리 슬펐을까.
보험금을 수령하는데, 전체 금액을 N분의 1을 해서 내 몫이 600만 원 정도라고 했다. 상냥하게 웃고 있는 직원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언제 어디서 있었던 사고냐고, 정말 XX이냐고. 하지만 물어볼 수 없었다. 그 직원이 너무 화사하고 밝아서 알려주지 않을 것 같았다. 또 내가 말더듬이처럼 버벅거릴 것 같았고 야무지게 말할 자신이 없어서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그냥 돌아서서 언니에게 갔다.
우리는 각자의 통장에 동일한 금액이 있다. 암묵적으로 둘 다 그 돈을 쓰지 않고 있다. 법 따윈 왜 개정해서 이런 사실을 굳이 상기시키는 걸까. 이런 돈은, 내가 돈이 없어서 놀이터 그네 밑을 파며 동전을 찾는 일이 있어도 절대로 받고 싶지 않다(요즘 놀이터는 모래가 없지만). 어차피 이제 엄마 이름으로 보험금을 탈 수 있는 기회 자체도 없어졌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