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를 도피하는 글쓰기 6
최근 생활 패턴이 점점 잡히고 있다. 새벽 3~4시에 자면 딱 9~10시에 일어난다. 11~12시에 자도 10시에 일어나니 조금만 잠을 줄여본다. 일어나면 노트북으로 일단 글을 끄적인다. 밑반죽이 있어야 나중에 구워 먹든 쪄먹든 할 것 아닌가. 열심히 치대면서 반죽을 만든다. 그렇게 몇 주 정도 달렸다. 어떤 요리가 될지 알 수 없는 한글 파일들이 몇 개 생겼다. 이왕 시작한 거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완결을 짓는 게 1차 목표다. 쓰고 나니 문득 생각이 든다. 죽이나 밥이나 일단은 먹을 수 있는 음식이라는 점에서 이미 엄청난데. 목표치를 조금 낮춰 본다. 떫은 감이 되든 까치밥이 되든 일단은 완결을 짓자!
며칠 전, 저녁에 타이핑을 치는데 계속 이응에서 오타가 났다.
'내가 너무 급하게 써서 그런가.'
시험 답안을 쓸 때도, 기획안을 작성할 때도 일단 최대한 빨리 끝까지 쓰고 내 실수를 이 잡듯이 찾으려고 눈에 불을 켜곤 했다. 조급한 성격을 따라 손가락의 움직임도 상당히 부산스럽다. 오타를 많이 내는 편이라서 키보드에서 제일 많이 쓰는 키는 어쩌면 백스페이스가 아닐까 싶다.
다시 천천히 써보는데도 이응에서 오타가 났다. 아무래도 이상해서 천천히 톡 하고 쳤다. 소리와 타건감이 달랐다. 뭔 일인가 싶어 키스킨을 걷는데 키스킨을 따라 키캡이 들렸다. 내가 너무 세게 타이핑을 쳤는지 이응 자리에 있는 키캡이 떨어져 나간 것이다. 다시 끼워 넣으려고 해도 이음매 하나가 부서져서 소용없었다. 쇼핑몰을 열심히 뒤졌다. 설마 키캡 하나 없을까 싶었는데 아직 없는 것도 있었다. 포털에 검색을 하니 키보드를 통으로 갈아야 해서 10만 원이 넘게 든다고 했다. 엄마야. 하나하나 따로 팔 수는 없던 것인가.
하는 수 없이 침대 밑에 고이 모셔뒀던 기계식 키보드를 꺼냈다. 나도 내 쇼핑의 방향을 종잡을 수 없다. 지금 생각하면 이걸 왜 샀는지 싶다. 올해 초 문득 기계식 키보드에 관심이 생겼다. 축의 종류와 제조사 등을 공부하고 타건감 시연 영상을 보면서 어떤 제품을 살지 일주일 넘게 고민했다. 막상 사고 보니 소리가 너무 컸고 노트북 키보드로 충분했다. 포장 그대로 방치했다. 게임도 하지 않는데 휘황찬란한 LED 라이트가 반짝이고 타이핑 소리는 우렁차다. 청축이 너무 시끄럽대서 적축으로 샀는데 어차피 고성방가 수준이라면 청축으로 맑은 타건감을 느껴도 좋았을 텐데 싶다.
확실히 키보드로 타이핑을 치면서 알게 되었다. 손으로 글씨를 쓸 때도 손가락 끝에 힘을 세게 쥐는 편인데 타이핑도 똑같다. 엄청 세게 치는지 손가락 마디가 가끔은 아린다. 의식하면서 가볍게 살살 눌러보지만 몰입하기 시작하면 우다다 소리가 난다.
예전의 나였으면 키캡 하나 떨어진 걸로 세상이 무너질 듯 자기 비하를 하며, 역시 난 글을 써선 안 된다며 여겼을 거다. 하지만 지금은 글 외엔 다른 선택지가 없으므로 아무 생각이 없다. 내가 쓰는 문장엔 이응이 많이 들어가나 보다. 열심히 썼나 보네. 혼자서 쓰담 쓰담하며 넘어갔다. 침대 밑에 두다가 중고로 팔거나 아니면 버렸을 기계식 키보드를 다시 꺼내 쓰는 거니까 나쁘지 않다.
무엇보다 이응이 아예 안 쳐지는 건 아니다. 각도를 잘 맞춰서 누르면 입력이 되긴 하니까. 내가 쓴 글도 유효하려면 타깃과 목적이 딱 정확하게 맞아야 될 텐데. 키캡 빠진 이응을 누르는 것처럼 지금은 헛스윙이 더 많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사람은 적응하는 존재 아닌가. 키캡 없는 이응을 잘 누르게 될 때쯤엔 내 글도 누군가에겐 유의미하게 다가가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