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조(躁)time
평소처럼 금요일 저녁 본가에 왔다. 안방으로 들어가 할머니한테 꾸벅 인사한다. 회사도 다니지 않으면서 일주일 동안 열심히 일한 사람 흉내를 낸다. 손을 씻고 나오는데 할머니가 주방으로 나와 갑자기 삼계탕을 끓이려고 한다. 할머닌 내가 올 걸 예상하고 싱크대 한 편에 조리된 삼계탕을 두 봉지를 녹이고 계셨다. 내가 안 왔으면 서운했을 거라고 언니가 귀띔한다. 이번 주에 집에 갈까 말까 고민을 하고 있었는데 자취방 앞까지 언니가 데리러 와서 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언니와 팔짱 끼고 집까지 걸어왔다.
초복 당일 갑자기 집에 온 아빠는 조리된 삼계탕 세 봉지를 할머니에게 주고 갔다고, 언니에게 들었다. 아빠가 삼계탕을 주고 간 건 모두의, 적어도 언니와 난 예상하지 못한 부분이었다. 우리의 첫 반응은 똑같았다.
"웬일이래."
어떤 사람을 떠올리고 실망을 하고 화가 난다면 아직 감정의 불씨가 남았다는 증거다. 우린 아빠에게 감정이 없다. 밑바닥까지 봤기 때문에 더 이상 실망할 것도 화낼 것도 없다. 물론 지금이 밑바닥이 아니라면 더 열 받을 수 있겠지만 그건 생각만으로도 끔찍하다. 우리는 이미 체념을 했으니 할머니께 자식으로서 도리만 잘해주길 바라는데 초복에 삼계탕이라니 놀랄 수밖에.
미리 언니에게 들었지만 난 애써 모른 척하고 삼계탕이 맛있다며 할머니에게 감사를 표한다. 할머니는 말없이 듣고만 계시다가 어디론가 계속 전화를 건다. 동생 방에 있지만 목소리가 큰 할머니의 전화 내용은 또렷이 들린다.
"어, 삼계탕 잘 먹었다."
할머니는 산후풍 때문에 옛날부터 닭을 잘 드시지 않았다. 이 생각이 들자 괜히 아빠에게 원망이 든다.
'닭 말고 다른 거 사 오지! 어? 설마 그것도 모른 건가?'
그러다가 다시 다른 생각이 든다. 할머니는 왜 어제가 아닌, 오늘, 그것도 내가 삼계탕을 먹고 나서야 아빠에게 전화를 건 걸까. 티 내지 않지만 여리고 생각이 많은 우리 할머니라면 '네가 사다준 걸로 네 딸들이 잘 먹었다.'라는 하고 싶었겠지. 아니, 어쩌면 우리가 직접 아빠에게 연락하길 바랄 수도 있겠다.
애써 생각을 지우고 다시 안방으로 간다. 할머니 옆에 자리를 잡았다. 임계장 이야기를 다룬 시사프로그램을 진지한 표정으로 보고 있다.
"일할 생각 꿈도 꾸지 마!"
괜한 걱정에 단속하니까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프로그램이 끝난 후 난 다시 거실로 나왔다. 우리 집 최고 상전인 햄스터를 구경했다. 햄스터는 침실인 코코넛 방에 들어가 버려서 엄밀히 말하면 햄스터 우리를 구경했다. 다시 동생 방으로 돌아간다. 역시 부지럼뱅이들 자정이 되기 전에 모두 잠자리에 든다. 불 꺼진 방에서 스마트폰을 하다 옛날 생각이 휘몰아친다.
별 하나에 유독 나에게만 박하던 상사
별 하나에 공개 망신을 주던 상사
별 하나에 자기 딸 대학 논문 과제를 시킨 상사
별 하나에 내가 쓴 기획안으로 기안 올린 상사
별 하나에 날 돌려까던 동료들
별 하나에 아! 거지 같은 직장과 회한 어린 과거여.
억울함은 이내 분노로 바뀐다. 또 감정의 쓰나미가 몰려오려고 해서 뭐가 문제인지 찾는다.
"아! 저녁 약을 안 먹었구나!"
난 동생 방에 있는데 내 짐은 모두 언니 방에 있다. 약을 먹으려면 최소 두 명은 깨워야 한다. 바깥쪽에 누워있는 동생을 깨워 문을 열어야 하고 약을 꺼내오기 위해 언니 방 불을 켜야 한다. 하루 안 먹는다고 죽겠냐 싶은 마음에 오늘 약은 건너뛴다.
공황장애와 우울증 진단을 받았지만 저녁 약엔 조증약도 있다. 한없이 나락으로 떨어질 때도 있지만 반대로 내가 나를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방방 뛸 때가 있다. '조'의 시기엔 굉장히 말하고 싶다. 하지만 이때를 경계해야 한다. 막상 말을 하면 대화 주제가 뒤엉켜버린다. 말을 하면서 머릿속에선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다.
'A 이야기도 해야 해. 맞다. B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지.'
'상대의 반응을 기다리고 자연스럽게 화제를 넘겨야 하는데...'
하지만 이미 A, B주제는 입 밖으로 나와 있다. '조'의 시기 대표 희생양은 언니와 정신과 의사 선생님이다.
그리고...
오늘의 희생양은
지금 이 글을 읽고 계신 당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