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면했던 신호들

징조(1)

착각 속에서 살았다. 내가 나를 보는 관점, 내 몸이 보내는 신호 자체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난 고등학교를 다니기 전까진 내가 반에서 중심이라 여겼고 엄청 사교적이고 활발한 아이라고 여겼다. 중학생 때 일이었다. 학교를 가지 않는 토요일, 동네에서 옆반 남자애를 스쳐 지나친 적이 있다. 며칠 뒤, 같은 반 아이가 그 남자애가 나를 본 이야기를 했다고 전해줬다. 뭐라고 했냐는 내 물음에.

"그 찐따에 못 생긴 애를 길에서 봤다고 했어."

못 생긴 건 알고 있었는데. 나, 애들 사이에선 찐따였구나.


고등학교는 동네와 멀리 떨어진 여고를 다녔다. 1학년 때 중간고사에서 배점이 큰 문제를 실수했다. 시험이 끝나고 교실에서 울었다. 반 아이들은 나를 위로해주며 안타까워했다. 통으로 0점 처리 될 줄 알았는데 부분 점수를 받았다. 70점인 줄 알았는데 96점이 되었다. 하나 틀리고 울던 내 모습이 가증스러웠나 보다.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난 고등학교 반년도 채 지나지 않아 왕따가 되었다. 당시엔 핸드폰도 없었다. 수업이 끝나면 2시간 걸리는 집에 가는 게 먼저였다. 내 뒤에서 어떤 소문이 도는지 관심 가질 여유도, 그걸 알아챘을 때 해명하고 싶은 열의도 없었다. 내가 다닌 여고는 소문이 빠른 만큼 와전도 빨랐다. 3년 내내 그냥 재수 없는 애로 살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아스라이 들리게 욕은 해도 대놓고 하거나 때리진 않았다는 거다. 난 싹튼 열등감을 공부 동기로 삼았다.

'나쁜 기집애들 내가 너네보다 좋은 대학 가고 만다.'


대학교도 학교에서 나 한 명 합격했다. 3년 동안 거리에 학을 떼고 집 근처에 있는 학교로만 지원했다. 지하철로 20분이 안 되는 거리였다. 과거 세탁의 꿈을 안고 입학했다. 활기차고 사교적이고 인기 있고 싶었다. 1학년 1학기는 괴로움의 연속이었다. 3년 동안 아스라이 들었던 욕은 크리티컬 하진 않지만 하나 강박을 안겨줬다. 재잘대는 소리에 과민하게 귀를 기울인다. 3년 동안 열등감은 무럭무럭 자랐다.

'지금 내 욕 하는 거 아냐?'

또 하나,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는 것처럼 쿨하게 행동하고 집에 가선 손톱을 뜯었다.

'너무 과했나? 나댔나?'

그리고 인싸가 되기엔 돈이 없었다. 고등학생 땐 집 가기 바빴다면 대학생 땐 아르바이트하는 곳에 가길 바빴다. 동기들 사이에서 볼멘소리가 터져 나왔다.

"넌 왜 맨날 알바 가?"

정말 건강한 사람이었다면 솔직하게 말할 수 있었을 거다. 하지만 난 내 현실을 부정하고 가면을 쓰고 있어서 동기의 물음에 수치심을 느꼈다. 반년을 참지 못하고 1학년 2학기부턴 아싸가 되었다. 그리고 학교에서 운영하는 무료 심리 상담 센터에서 매주 1회 2시간씩 상담을 받았다. 꼬박 2년 동안. 대학을 졸업할 때야 인정했다. 내가 보는 나와 실제 내가 그동안 괴리가 컸구나. 이젠 인정하자. 억지로 인싸가 되진 말자.


관점의 착각은 20대 중반에 깨달았다. 하지만 몸이 보내는 신호는 30대가 되어서야 알아챘다. 난 어렸을 때부터 "담배 냄새"라고 부르는 느낌이 있었다. 마치 담배를 코앞에서 피우는 것처럼 숨이 막힌다. 코가 꽉 막혀서 의식적으로 숨쉬기를 몇 분 하면 "담배 냄새"가 지나간다. 어렸을 땐 내가 모르는 어딘가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구나, 난 담배 냄새에 참 예민하구나 싶었다. 하지만 올해 중순에 겪은 극도의 스트레스 상태(다음 편에 다룰 예정)에서 벗어나기 위해 담배에 잠깐 손을 댔다. 진짜 담배를 피우고 나서 알아챘다. 그동안 내가 "담배 냄새"라고 부른 건 숨 쉬기 어려울 때를 내가 착각한 거라고.


또 하나는 '지하의 공기질'로 부른 것이다. 광화문 교보문고를 갔을 때와 고속버스터미널 지하상가를 갔을 때였다. 30분이 채 지나지 않아 숨이 가쁘고 머리가 아팠다. 깨질 듯이 아프고 울렁거릴 때도 있었다.

"지하라서 공기질이 안 좋은 가봐."

같이 간 친구에게 둘러댔다. 광화문 교보문고는 내가 좋아하는 장소이기도 해서 혼자 갈 때도 많았다. 머리가 아프면 두통약을 먹고 한쪽 구석에 쉬다가 다시 책 구경을 하곤 했다.


작년 말, 병원에서 공황 장애 진단을 받고 보니 놓쳤던 것들이 많이 보였다. 일단 난 고등학교 시절 사람이 한 곳에 밀집한 지하철을 이용하는 것이 무서워 족히 30분은 더 걸리는 버스로 통학했다. 대학교에 와선 러시아워가 없는 6호선을 더 한적한 시간에 이용했다. 강의를 수강할 땐 대형 강의는 최대한 피했다. 필수 과목으로 대형 강의를 들을 땐 사람들로부터 최대한 떨어져 앉고 싶어 했고 강의를 들을 땐 항상 긴장하며 버텼고 수업이 끝나면 기진맥진하며 일단은 쉬어야 했다. 도서관에서 시험공부를 할 때 여러 사람이 같이 앉는 긴 책상엔 앉지 못했고 칸막이가 있는 열람실엔 한 시간도 제대로 있지 못했다. 물론 평소 도서관을 이용할 때도 긴 책상엔 앉지 못하고 안쪽 제일 인적 드문 자리에 앉고 서야 마음이 놓였다. 교보문고와 고속버스터미널 지하상가를 공기질로 운운하기엔 다수의 이용자가 많고 하루 종일 근무하는 사람도 있다. 특히 사람이 없는 평일 오전에 갔을 땐 숨이 가쁘지도 두통이 오지도 않았다. 규모가 작은 서점이라도 사람이 많으면 비슷한 증상을 겪었다.


대학 때 2년 동안이나 심리 상담을 받을 때도 내내 울면서 말했다. 근처에 살았지만 가정 형편이 어려웠던 난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기숙사에서 1년 살았다. 교통비랑 식비도 아낄 수 있었고 좁은 방에서 부대끼며 생활는 것에서 잠깐 동안 벗어날 수 있었다.


기숙사의 배려로 행정실 알바를 하며 생활비도 벌었는데 나를 본 어떤 직원은 회사 생활 못할 것 같다고 하셨다. 시키는 일은 잘했지만 말을 잘 못 했다. 내 모습을 본, 기숙사 사감님인 수사님은 나를 신부님께 데려가 상담을 받게 하셨다. 수사님은 정기적으로 장기 상담을 기대하셨는데 신부님은 한 번 상담으로 끝내셨다. 상담을 마치고 온 내게 수사님은 물으셨다.

"신부님이 다음 주에도 오라고 하셨니?"

난 해맑게 대답했다. 지금 생각하면 참 가볍고 생각 없이.

"아뇨, 잘 지내라고 하고 또 오라곤 안 하셨어요. 감정이 오면 부정하지 말고 그 감정이 지나갈 때까지 기다리면 된다고 하셨어요."

그때 수사님 눈에 어린 당혹감과 실망감은 잊지 못한다. 그리고 날 신부님께 데려가 줄 정도로 신경 써주신 것에 대한 감사함도.


과거가 보낸 무수한 신호들을 모두 가볍게 흘려보냈다. 의사 선생님한테 받은 처방을 보고 나서야 내 몸이 보낸 신호들이 찬찬히 보였다. 성적과 대학, 당장 이번 달 생활비가 급급해 모든 신호를 나 좋을 대로 곡해해서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게 되었다.


지금이라도 제대로 볼 수 있어서 다행이다. 물론 훗날 이것도 잘못 판단한 거라 여길 수 있겠지만. 적어도 내가 보내는 신호들을 예전처럼 가볍게 무시하진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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