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스피싱에 대처하는 세 가지 방식

할머니, 언니, 나

몇 주전 아침부터 언니에게서 톡과 문자 메시지 이미지가 하나 왔다. 자다 일어나 비몽사몽으로 보는데 '미친 인간아'라는 문자 내용에 정신이 번쩍 뜨였다. 아침 댓바람부터 무슨 일인데 욕을 시전 하는 걸까. 무슨 일인지 물어보니 아침부터 보이스피싱이 전화가 왔다나. 못 쏟아낸 게 후회돼서 발신 번호로 문자를 보냈다고 했다. 문자만 봐도 언니가 얼마나 화가 났는지 느껴졌다. 분노한 캐릭터가 한 발로 땅을 구르는 모습이 상상되었다.

<보이스피싱 전화를 끊고도 화가 나 분노의 문자를 보낸 언니 / 사진 출처 우리 언니>

언니의 대처 방식을 보면서 할머니와 내가 겪은 보이스 피싱 일화가 떠올랐다. 각자의 성향이 빛을 발하는 재미있는 사례라서 적어본다.


"아, 네. 그렇군요."

내 통장이 대포통장에 이용되었다는 전화를 받았을 때였다. 나는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어디까지 말하나 보자 하는 마음 반, 내 정보가 어디까지 털린 건지 궁금한 마음 반. 사주를 보러 가면 정말 맞추는 건지 아니면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보편적인 이야기를 그럴싸하게 꾸민 건지 의심하곤 하는데 피싱 전화를 받을 때도 그랬다. 우리은행 통장이 있긴 한데. 정말 조사를 한 건지 아니면 가능성을 보고 때려 맞춘 건지. 사기꾼이 어디서 근무를 하며 그의 사무실 위치도 물어보았다. 한 10분 넘게 들었을 때 시간 낭비인 것 같아 나중에 다시 연락드리겠다 하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할머니가 겪은 보이스피싱 사건은 굉장히 악질이었다. 연기자와 협박범 두 명으로 구성되어 노인을 궁지로 몰았다.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데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편의점에서 일할 줄 알고 있던 JY의 우는 소리가 전화 건너편에서 들리고 JY가 빚을 졌으니 돈을 내놓으라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고 했다. 공교롭게도 JY는 연락이 통 되지 않아 할머니의 걱정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JY의 이름을 알고 있는 거 보면 우리 정보가 어디서 새긴 한 것 같다.


"JY야. 근데 네가 우느라 그런지 목소리가 좀 이상하다."

엉엉 우는 소리와 함께 돈이 필요하다는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할머니는 지금 그쪽으로 갈 테니 장소를 알려달라고 했지만 사기꾼들은 장소는커녕 입금을 종용했다. 할머니 입장에선 우는 손녀딸 목소리가 들리고 돈 이야기가 나오니 당장 쫓아가고 싶은 심정이었을 거다. 계속 찾아가겠다는 할머니의 반응에 사기꾼들은 자기 뜻대로 되지 않자 욕을 하고 끊었다는 후문이다. JY는 이후 톡으로 연락이 되면서(편의점에서 전화를 하긴 어렵다) 일단락되었다.


우리 언니는 직설적이고 복잡한 문제를 단순화해서 해결하는 경향이 있다. 끓는점이 높은 편인데 한 번 끓으면 일단 도망쳐야 한다. 첨부한 이미지에서도 형언할 수 없는 분노가 느껴진다. 물론 아침 첫 전화가 보이스피싱이라면 엄청 화가 나는 건 당연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화가 오래가진 않는다는 점이다.


반면 난 생각과 의심이 굉장히 많은 편이다. 호기심도 많아서 일단은 사기꾼인 걸 알아챘지만 어디까지 이야기 하나 간을 보는 타입이랄까. 이야기를 듣다가 순간 탁하고 생각이 전환된다.

'시간 아깝게 내가 왜 이걸 듣고 있는 거야.'

내가 속지 않았기 때문에 화는 나지 않는다. 끝까지 같은 톤으로 전화를 끊었다.


할머니 일화를 나중에 들으며 할머니의 연륜과 강단을 여실히 느꼈다. 할머닌 놀라긴 했지만 패닉에 빠지지 않고 JY의 목소리를 들어 본인 확인을 하려 한 점과 JY의 신변을 확보하기 위해 장소를 물었다는 점이다. 물론 할머니는 보이스피싱이란 걸 JY가 편의점에 있단 걸 확인하고 나서야 아셨다. 위기의 상황에서 굉장히 이성적으로 대응하신 할머니가 멋있어 보였다.


할머니와 언니의 공통점은 둘 다 행동파인 점이다. 언니는 분노를 문자를 통해 표출했고 할머닌 JY를 찾으러 갈 생각을 하셨다. 평소에도 두 사람은 상당히 부지런한 편이고 고민할 시간에 일단 지르고 보는 타입이랄까. 할머니는 최근 갑자기 돌침대를 사셨고 언니는 몇 달 전 갑자기 햄스터를 분양받았다. 전조가 없어서 신기하다. 고민하는 기색이 전혀 보이지 않아서.


반면 난 귀를 긁적이며 가만히 앉아 생각한다. 고심에 고심을 거듭해서 한 발을 내딛으면 그나마 다행이다. 찬 바닷가에서 발가락 조금 담그고 도망치는 꼴이긴 하지만. 참다 못해 같은 말을 반복하는데 그 희생양은 대부분은 언니다.

"그만 생각하고 그냥 사라니까?"

"제발 그만 고민해."

언니의 대답을 듣고도 우물쭈물한다. 결국 생각에 파묻혀 질릴 때까지 오면 다시는 떠올리지 않는다. 갑자기 고민의 원흉(사고 싶은 물건이라든가)에 화가 난다.

'스트레스만 주고 내 시간을 얼마나 허비하게 만드는 거야.'

애초에 내가 그렇게 생각한 거지만.


보이스피싱 하나로도 성향이 두드러지는 게 신기하다. 같은 지붕에서 30년의 시간을 보내며 이제는 조금씩 보인다. 어렸을 땐 같은 점만 보였다면 다른 점이 하나둘. 달라서 좋다. 부지런하고 활동적인 할머니와 언니의 에너지를 받으면 생각을 떨치고 몸을 일으킬 수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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