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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늘의 축구 Jan 04. 2016

You'll Never Walk Alone

호주 브리즈번, 선콥 스타디움 

2015년 7월 17일 저녁 9시 20분. 


호주 브리즈번국내공항에서 시드니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자리에 앉아 심호흡을 크게 한 번 하고, 벅찬 감정을 뚫고 나오려는 눈물을 애써 꾹 참았다.


1년. 짧고도 길었던 호주에서의 생활 끝자락에 너무나 큰 선물을 받고 돌아간다는 생각이 나로 하여금 시드니로 향하는 비행 내내 그렇게 심호흡을 몇번이고 반복하도록 만들었다.



피날레의 시작


호주에서의 생활을 2개월정도 남겼을 때였다. 여느때와 다름없이 페이스북을 보던 도중 한쪽에 나오는 광고가 눈에 띄었다.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소속팀 리버풀이 브리즈번으로 프리시즌 경기를 위해 온다는 것이었다.


그 순간부터 고민이 시작됐지만 길진 않았다. 마침 비자 만료날짜를 3주 정도 남겨두고 하던 일을 그만둔 터였다. 그리고 친구의 오만가지 조언이 더해지니 어느새 경기 티켓과 숙소 예약이 완료되어 있었다.


마침내 7월 16일 새벽, 눈을 떠 미리 꾸려놨던 가방을 메고집을 나섰다. 들뜬 마음으로 브리즈번행 비행기에 몸을 싣고 날아갔다. 피날레가 시작됐다.




Show Your Colour


브리즈번 시내에 도착하자마자 역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곧 열릴 브리즈번 로어스(브리즈번 연고 A리그 클럽)와 리버풀 FC의 친선경기 현수막들이었다. 거기엔 'Show Your Colour' 라는 문구가 적혀있었는데, 당연히 난 'Red!!!'였다. 참고로 브리즈번 로어스의 컬러는 주황색이다.


햄치즈 샌드위치와 롱블랙 한잔으로 허기를 채우고 리버풀 팬들을 위한 공간이 마련된 '킹 조지 스퀘어'로 걸음을 옮겼다. 


임시 팝업 스토어 형태로 세워진 리버풀 공식 스토어와 공식 후원업체가 마련한 페스티벌 행사장이 보였다. 벌써 제법 많은 사람들이 스토어가 열리길 기다리고 있었다. 게다가 이날은 리버풀의 영광을 빛냈던 루이스 가르시아, 디트마르 하만 그리고 이안 러쉬가 팬들과의 만남을 갖기로 되어 있어 머지 않아 더 많은 사람들이 몰릴 분위기였다.


우선 공식 스토어가 오픈하자마자 머플러, 경기책자, 모자 등 기념이 될 만한 물건들을 샀다. 그리고는 가까운 카페 화장실에 들러 미리 시드니에서 준비해온 리버풀 유니폼으로 갈아입었다. 방금 산 머플러까지 두르고 나니 나는 진정한 'Red'가 되었다.


아직 메인 이벤트까지 시간 여유가 있어 숙소 체크인도 할 겸 시내 여기저기를 구경하고 다시 광장으로 돌아오니 어느새 행사장은 온통 붉은색으로 뒤덮여 있었다.


이윽고 루이스 가르시아와 디트마르 하만, 두 레전드가 등장했고 행사장엔 엄청난 환호성이 터졌다. 딱 10년 전 내게 리버풀이라는 팀의 매력을 한껏 느끼게 해준 '이스탄불의 기적' 주인공들 중 두 명이 내 눈앞에 실제 나타난 것이다. TV 앞에서 소리도 못내고 멍하게 앉아 있던 고등학교 2학년 풋내기가 이제 세월이 흘러 그 주인공들을 앞에두고 힘껏 소리치고 있다. 감회가 남달랐다.


푸근한 인상의 아저씨가 된 디트마르 하만과 방부제에 절인듯 그대로인 루이스 가르시아를 보고 있자니 10년 전 이스탄불에서 뛰던 모습이 자동으로 오버랩됐다. 물론 하만은 지금보다 훨씬 마르고 강인해보였던 독일 선수였다. 


나는 두 사람의 싸인을 받기 위해 한참을 기다렸지만 일정 문제로 아쉽게도 실패. 저녁에 있을 새 원정 유니폼 공개 행사를 위해 이언 러쉬와 함께 다시 광장을 찾을 것이란 말에 희망을 걸어야 했다.


리버풀의 레전드 - 하만, 러쉬, 가르시아


다시 예정된 시각이 되자 이언 러쉬가 무대에 올랐고 뒤이어 하만과 가르시아도 함께 자리에 앉았다. 이런저런 인터뷰 세션을 진행한 뒤 이들과 직접 인사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다. 해가 저문 광장에서 벌벌 떨며 기다린 보람이 최고조에 다다른 순간이었다. 사실 러쉬는 내가 직접 경기를 보고 자란 세대가 아니기 때문에 큰 감흥이 없었지만, 하만과 가르시아는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 고교 2학년 때로 돌아간 것 마냥 행복했다.


팬 미팅 행사가 끝나자 워낙 한참을 떨며 기다린 탓에 급 허기가 몰려왔다. 근처 패스트푸드점에 들러 간단히 요기한 뒤 곧 있을 리버풀 공개훈련 시간을 맞추기 위해 발걸음을 서둘렀다. 다들 나와 같은 일정을 짠 건지, 다음 날 브리즈번 로어스와의 경기가 열릴 '선콥 스타디움'으로 향하는 인원이 제법 많았다.


경기장 관중석에 입장하자 리버풀 코치들이 하나 둘 피치로 나와 훈련도구들을 설치하기 시작했다. 이어 당시 감독이었던 브랜든 로저스가 등장해 훈련 준비 상태를 점검했고 마침내 선수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당시 호주 투어에는 펠리페 쿠티뉴, 다니엘 스터리지 등 주축 선수 일부가 부상으로 함께 하지 못했다.


경기 전날 공개 훈련에서 웜업 중인 리버풀 선수단


조깅을 시작으로 자체 연습경기까지 마친 리버풀 선수단은 몇몇 선수들을 대표로 세워 언론들과 인터뷰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경기장을 떠나기 전, 팬들에게 인사를 건네는 잠깐의 타이밍에 엄청난 싸인 공세를 받았다. 갑자기 사람이 몰린 탓에 나는 낄 엄두도 못냈다. 최대한 가까이에서 선수들의 모습을 카메라로 담아내는 것으로 만족하고 숙소로 발걸음을 돌렸다.


이날 찍은 사진들을 정리한 뒤 부푼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었다.



기다리고 또 기다리다


브리즈번에서의 두 번째 아침이 시작됐다. 숙소에서 체크아웃을 한 뒤 이제 익숙해진 팬 광장으로 나섰다. 루이스 가르시아가 오늘도 팬 미팅을 위해 다시 오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어제가 메인 행사여서인지 오늘은 큰 어려움 없이 내 차례를 맞았다. 머플러에 사인을 받고는 함께 사진을 찍었다. 호주에서 최고로 해맑은 순간이었다.


팬 싸인회에서 루이스 가르시아와 함께


경기 시작 시간은 저녁 5시 45분. 브리즈번 시내를 구경하다가 페이스북에서 리버풀 선수단이 H 호텔에 머물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망설일 틈이 없었다. 오늘이 지나면 나도, 리버풀 선수들도 브리즈번에 없다. 발걸음을 곧바로 옮겼다. 경기장 이동을 위해 버스에 올라타는 선수, 코치진, 관계자들을 지근 거리에서 볼 수 있겠지? 설레는 마음에 걸음을 재촉했다.


역시나 많은 팬들이 호텔 정문 앞에 장사진을 치고 있었다. 중요한 건 이 사람들 모두 공식 일정이나 행사장이 아닌 상황에서 '막연히' 기다리고 있다는 점이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고, 내 옆에서 커다란 비디오 카메라를 들고 두 시간은 족히 기다린 것 같아 보이던 현지 카메라 기자도 크게 다를 것 없었다. 이윽고 선수단이 나오자 나와 그 기자, 그리고 현장의 많은 사람들이 마치 특종이라도 잡겠다는 듯한 자세로 저마다의 기기에 한 장면이라도 놓칠세라 바삐 담아냈다.


특별하고도 재밌었던 기다림의 경험을 뒤로하고 경기를 보기위해 움직였다. 쌀쌀했던 날씨에 장시간 앉고 서기를 반복했지만 피곤할 겨를이 없었다. 피날레의 진짜 피날레를 위해.



You'll Never Walk Alone


리버풀의 홈구장인 안필드도 아니였건만, 선콥 스타디움으로 가는 길은 온통 붉은색이었다. 엄청난 인파가 동시 붉은 물결을 이루며 행진하는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였다.


나도 인파에 묻혀 경기장에 도착했다. 경기장 앞은 깃발과 캐치 프레이즈들을 펄럭이는 서포터들로 가득차 있었다. 좌석에 맞는 게이트를 찾아가는 동안 이름 모를 리버풀팬과 함께 장난스럽게 사진도 찍어보고 가열차게 응원가를 불러제끼던 아저씨 서포터들과도 격렬하게 인사했다. 라이벌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깎아내리는 내용의 응원가였다.


힘차게 응원가를 부르던 아저씨 서포터들


경기장 입구를 지나 제법 긴 시간을 걸어올라갔다. 분명 전날 공개훈련을 보러 왔던 경기장이었지만 느낌이 또 달랐다. 관중들이 하나 둘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저녁 5시 20분, 양 팀 선수들이 몸을 풀기 위해 피치로 나왔다.


선수들을 정신 없이 카메라에 담다보니 킥오프 시간이 다가왔다. 저녁 5시 40분. 드디어 선수들이 모든 준비를 마치고 피치로 들어섰다. 심판진을 중심으로 양쪽에 일렬로 도열했다가 교차하며 인사를 나누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경기장에 노래 한 곡이 흘러나오기 시작했고 스탠드를 가득 채운 모든 관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You'll Never Walk Alone


환상적인 떼창이 끝나고 엄청난 환호성과 함께 경기가 시작됐다. 


탐색전이 계속되던 전반 15분, 브리즈번 로어스가 선제골을 터뜨렸다. 그리고 10분 뒤 리버풀의 아담 랠라나가 동점골을 만드는데 성공했다. 1층 리버풀 응원석에 위치한 서포터들은 난리가 났다.


한 가지 재밌었던 건 함께 붉은색 리버풀 유니폼을 입고 있던 내 주변 사람들의 반응이 브리즈번 골에 더 격렬했다는 점이다. 브리즈번의 선제골에는 벌떡 일어나서 환호성과 박수를 보내더니 리버풀 동점골에는 그저 박수만 조금 보내다 말았다. 비록 지금은 다같이 축제를 즐기려 잠시 빨간색을 입고 있지만 그래도 엄연히 이곳은 호주 브리즈번. '우리팀'이 선제골을 넣고 '우리팀'이 실점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점수판의 변화 없이 전반전이 종료됐다. 내 호주생활 피날레도 그렇게 끝이 나고 있었다. 비자 만료날짜가 그렇게 미울 수 없었다.


추가 득점 없이 경기가 모두 끝난 뒤, 나는 미련을 못 버리고 5분 정도 더 멍하니 앉아있었다. 만감이 교차했다. 그러다 문득 정신을 차려 머플러를 들고 기념사진을 하나 찍었다. 부랴부랴 경기장을 벗어났다. 잰걸음으로 공항가는 차를 타기 위해 걸어가는데 뒤에서 누군가 불렀다. 


"어이! 같이가!" (물론 영어로)


뒤를 돌아봤는데 맥주 한 잔과 칩스를 들고 남자 둘이 오고 있었다. 내가 돌아서서 다가갔다. 그러자 'You’ll Never Walk Alone' 을 부르며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다.


See? Now you’re not walking alone.
(봤지? 이제 너 혼자 걷고 있는 거 아니야)

 



글·사진 - 최대현 (축구전문 팀블로그 더풋블러 운영자)

영상 - 최대현

교정 - 오늘의 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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