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 울산문수축구경기장
2013년 12월 1일, 울산에서 열린 리그 최종전. '동해안 더비'는 마지막까지 긴장된 흐름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0대 0 팽팽한 경기의 끝무렵, 극적으로 웃은 팀은 원정팀 포항이었다. 김재성의 프리킥에 이어 벌어진 혼전 속에 김원일이 결승골을 마무리 지으면서 원정석을 가득 메운 포항팬들, 벤치에 있던 동료들을 모두 열광시켰다.
모든 버저비터 골이 다 그렇겠지만, 포항의 승리를 확정 지은 이 골도 경기를 지켜보던 축구팬들에게 짜릿한 감정을 선물했다. 그러나 이 장면은 워낙 많은 사연을 담고 있어서 흔치 않은 버저비터 골 중에서도 단연 특별할 수밖에 없다. 이날 무려 95분에 터진 김원일의 결승골은 한국 축구사에 오래도록 남을 최고의 명경기, 명장면을 낳았다. 2013년 12월 1일, 나도 직관하고 온 울산 문수경기장에선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과거 K리그 PO(플레이오프) 시스템 시절엔 '챔피언 결정전'이 존재했다. 이 경기에서 우승팀이 정해진다는 사실은 90분 내내 긴장감을 선사하는 가장 큰 이유였다. 그래서 이 경기는 팬들에게 '시즌 하이라이트'라 불릴 정도로 많은 이들의 이목을 끌곤 했다.
하지만 2012시즌 이후 K리그는 PO 시스템이 아닌 스플릿 시스템을 도입하면서 PO 시스템의 단점을 줄이는 식으로 제도 변화를 꾀했고, 반대급부로 수많은 명장면, 명경기를 낳았던 챔피언 결정전을 그리워하는 팬들의 목소리도 꾸준히 이어져왔다.
그런 와중에 2013년 스플릿 라운드 최종전에서는 PO 시스템 하에서만 존재할 줄 알았던 바로 그 '챔피언 결정전'이 완벽히 재연됐다. 마지막까지 리그 우승을 놓고 경쟁을 치른 1, 2위 팀 울산과 포항(승점 2점차)이 최종전에서 맞대결을 펼치게 된 것이다. 가뜩이나 두 팀은 지리적으로 '동해안 더비'를 펼쳐온 오랜 앙숙 관계이고, 홈 앤 어웨이도 아닌 단판 경기를 치르는 만큼 자연스레 챔피언 결정전 그 이상의 기대가 모아졌다.
원래 울산은 마지막 경기와 관계없이 우승을 확정 지을 기회가 있었다. 시즌 종료까지 남은 2경기에서 1무만 거뒀어도 리그 우승은 울산의 차지였다. 하지만 최종전 직전에 치른 부산 원정에서 종료 직전에 1대 2 역전패를 당하며 우승 경쟁을 최종전까지 끌고 왔다. 게다가 부산전에서 경고를 받은 주전 공격수 김신욱, 하피냐가 경고 누적으로 최종전에 출전할 수 없게 되면서, 울산은 윤성효(당시 부산 감독 / 前 포항 선수)의 늪에 제대로 빠져버린 셈이 됐다.
승점 2점 차, 최종전 결과에 따라 우승팀이 갈리는 상황. 단, 포항은 반드시 이 경기에서 이겨야만 우승할 수 있었기에, 산술적으로 아직은 울산이 좀 더 유리한 위치인듯 보였다.
스플릿 시스템에서 챔피언 결정전을 보게됐으니, 망설임 없이 직관을 준비한 축구팬들 역시 많았다. 부산 vs 울산전을 라이브로 봤던 나 역시 생전 처음 방문하는 왕복 10시간 울산행을 결심하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직접 마주한 울산 문수경기장은 클래식한 매력이 돋보였다. 수도권의 월드컵경기장과 비교해 커다랗고 화려한 느낌을 주진 않았지만, 아담해 보이면서도 원형으로 이루어진 구조 덕에 경기장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몰입감을 받았다. 또 경기장 내부에 들어서자 시원시원한 구조와 넓은 통로 등 이동 과정에서 전혀 불편을 주지 않는 넉넉함이 만족감을 배가시켰다. 특히 우승 세레머니를 보기에 안성맞춤이라는 추천을 듣고 예매한 W석의 시야는 듣던 대로 매우 좋았다.
90분 간의 경기는 팽팽했다.
두들기는 포항과 막아야 하는 울산의 치열한 대립이 이어졌다. 주전 공격수가 모두 빠져 '철퇴 축구'의 뾰족한 가시를 드러내지 못한 울산은 시간이 지날수록 시간 지연 행위를 반복했다. 그러자 이를 보다 못한 포항 팬들이 경기장에 물병을 다량 투척하는 해프닝도 벌어졌다. 추가시간까지도 내내 물병 투척은 이어졌고, 오죽하면 방송 카메라가 화면에 떨어진 물병을 클로즈업해 잡아주는 부끄러운 상황 마저 연출됐다.
하지만 이런 분위기는 현장에서 경기에 대한 긴장감을 더욱 증폭시켰고, 종료 시각이 가까워지자 내 주위에 앉아 있던 양 팀 팬들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경기에 완전히 몰입한 모습이었다. 관중석에서 경기를 보던 울산의 김신욱도 어느새 유니폼을 점퍼 안에 입고 내려와 벤치에서 세레머니를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순간 보고도 믿기지 않는 골이 터졌다.
축구를 본 이래, 그리고 그 후로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보지 못한 가장 순수한 기쁨과 슬픔의 대립을 목격한 순간이었다. 이 한 장면으로 두 팀 팬들의 명암은 엇갈렸다. W석 정중앙에 앉은 내가 고개를 돌릴 때마다 보이는 풍경이 달랐다. 이런 경기와 일정이 잡힌 것도 대단했지만, 그런 경기에서 추가 시간에 결과가 정해지는 과정을 지켜보니 경이롭지 않을 수 없었다. 이날, 이 순간의 기억은 나로 하여금 축구란 무엇인지 다시 한 번 돌아보게 해주었다.
흔히, 언제 봐도 그 감동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장면을 '명장면'이라 말한다. 이날 본 동해안 더비가 바로 그렇다. 내가 다녀온 최고의 직관, 그리고 내가 축구에서 본 최고의 장면을 꼽자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순간이 바로 이 장면이다. 나는 포항팬도 울산팬도 아니다. 그렇게 양 팀의 지지자가 아님에도 축구 직관, 아니 인생 최고의 순간 중 하나로 꼽고 싶을 정도로 깊은 감동을 이날 경험했다.
글로 다 표현이 안 되는 이 엄청난 사건을 겪은 후 울산과 포항의 대립은 어느 더비보다도 더욱 치열해졌다. 그리고 이 경기를 직관한 덕분에 나는 계속해서 두 팀의 다음 스토리를 확인하기 위해 매시즌 '동해안 더비'를 챙겨보고 있다.
비록 이날은 울산이 울분을 삼켰지만 98년 플레이오프(종료 직전 김병지 결승골로 승부차기 끝에 울산 승)의 기억이 있듯, 언제든지 또 복수의 기회가 있다는 게 축구와 더비의 묘미이지 않을까?
지금 바로 가까운 '동해안 더비' 일정을 확인해보자!
글·사진 - 임형철 (축구전문 블로그 임형철의 축구칼럼실 운영자)
영상 - 임형철, MBC 스포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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