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캘리포니아, 스텁헙 센터 (홈 디포 센터)
누구에게나 영웅은 있다
당신의 축구 영웅은 누구인가? 당신을 처음 축구에 빠져들게 한, 동경의 대상, 플레이를 볼 때마다 가슴 설레는, 죽기 전에 꼭 한 번은 만나보고 싶은 그런 선수 말이다.
내 축구 영웅은 데이비드 베컴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처음 접한 것은 2000년대 초반이었다. 축구 유니폼이 필요하다는 말에 어머니가 처음 사다주신 유니폼 뒷면에 그의 이름이 박혀 있었다. 그가 어떤 선수인지 찾아보고는 부담스러운 마음에 유니폼을 입는 것을 꺼려했던 기억이 난다. 왜, 어렸을 땐 다들 그러잖는가? "네가 베컴이라고? 네가?" 입기도 전에 또래들의 놀림이 떠올라 부끄러웠다.
하지만 그것은 한편으로는 동경이었다. 그는 너무나 멋진 축구선수였으니까. 다들 알 것이다. 당시 세계 4대 미드필더로 지단, 피구, 베론과 함께 베컴이 꼽혔다는 것을. 자연스레 그는 내 마음 속 축구 영웅으로 자리 잡았다. 이후 그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아가면서 그 마음은 더 굳어졌다.
두 번의 코너킥으로 일궈낸 '누 캄프의 기적', 그의 오른발을 영국의 자랑 중 하나라고 소개한 영화 '러브 액츄얼리'의 대사, 영국을 2002 월드컵 본선에 올려놓은 환상적인 프리킥, '갈락티코 군단' 레알 마드리드에서도 빛나던 활약상…
내가 그를 영웅으로 여기게 된 여러 이유들이다. 그런 이유들이 하나씩 늘어날 때마다 내 생각도 확고해졌다. '그가 은퇴하기 전에 꼭 내 두 눈으로 뛰는 모습을 보고 말겠다!'
기회는 2012년에 찾아왔다. 베컴이 미국 MLS(메이저리그 사커) LA 갤럭시에서 뛰고 있을 때였다. 당시 어학연수 차 미국에 있던 나는 귀국 전에 그를 보러 가기로 마음먹었다.
일정은 다행스럽게도 맞아떨어졌다. 내가 LA에 체류하고 있을 때, LA 갤럭시의 홈경기가 예정돼 있었다. LA 갤럭시가 몇 위인지, 상대가 누구인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무작정 티켓을 끊고 경기장을 찾았다. (나중에 알았는데, 상대는 D.C. 유나이티드였다)
2012년 3월 18일. 날씨 맑음. 나는 카메라를 들고 '23 BECKHAM'이 새겨진 유니폼을 입은채 LA 갤럭시 홈구장인 홈 디포 센터(2013년 구장 명명권 계약에 따라 스텁헙 센터로 이름이 바뀌었다)를 찾았다. 그의 유니폼을 입는 것이 이젠 부끄럽지 않았다.
경기 전, 경기장 주변을 둘러봤다. LA 갤럭시 오피셜 샵도 찾았다. 사고 싶은 물품이 많았는데 비싸서 차마 지갑을 열지 못했다. 뒤에 이야기하겠지만 이것은 결과적으로는 매우 옳은 선택이었다!
경기장에 들어선 후, 나는 어느 자리에 있으면 그를 가장 가까이서 볼 수 있을까 고민했다. 결론은 코너 플래그. 오른발로 감아 차기 좋은 위치의 코너 플래그 근처에 있으면 무조건 그가 코너킥을 차러 올 것이라고 예상했다. 생각해보라. 베컴 말고 누가 코너킥을 차겠는가?
다행히 코너 플래그 근처엔 관중이 거의 없었다. 나는 그곳에 자리를 잡았고, 곧 몇몇 멕시칸들이 내 옆에 자리했다. 분명 나처럼 베컴을 가까이서 보고 싶어 온 이들이리라. 나는 그들과 눈인사를 나누며 킥오프를 기다렸다.
경기가 시작됐다. 나는 초조한 마음으로 코너킥을 기다렸다. 내가 앉은 자리는 D.C. 유나이티드 진영. 전반에 코너킥이 나지 않는다면 나는 베컴을 가까이서 볼 기회를 놓치는 것이었다. 흥미로운 공방전이 펼쳐졌지만, 내 관심은 오로지 베컴이었다. 로비 킨이 내 앞에서 발재간을 부리고 갔음에도!
그러다 전반 20분께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마침내 코너킥이 상황이 만들어졌다. 그가 점점 가까워졌다. 내 가슴은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부끄러움도 잊고 큰 소리로 그의 이름을 외쳤다. "베컴, 베컴! 히얼(Here)! 히얼!" 내 옆에 앉아 있던 멕시칸들도 나와 같이 큰 소리로 그의 이름을 연호했다. 우리는 한 마음이었다. 목소리가 들렸을까? 도움닫기를 하던 그가 우리 쪽을 슬쩍 보고 웃었다.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손 뻗으면 닿을 것 같은 거리에서 가장 만나보고 싶었던 축구 선수를 보면 어떨 것 같은가? 머리가 새하얘진다. 카메라로 그를 찍고, 눈으로 그를 보고를 반복했다. 누군가 옆에서 나를 봤다면 분명 조금 모자란 사람처럼 보였을 것이다. 왜 그랬냐고? 그의 모습을 카메라로 담아야 할지 눈으로 지켜봐야할지 결정을 못 내린 상태였으니까. 무엇에 집중해야 할지 끝까지 결정하지 못했다.
그리고 전반이 마무리될 때까지 그는 몇 번 더 코너킥을 차러 왔다. 그때도 나는 계속 뷰파인더 속 그를 찍고,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를 반복했다. 다시 말하지만 사진과 영상으로만 봐왔던 나의 영웅을 눈앞에서 보는 느낌은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로 감동적이었다. 그의 은퇴가 가까웠기 때문에, 이제 내가 더 이상 그의 경기를 보러 올 수 없기 때문에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 순간이 인생에 다시 없을 경험임을 분명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폭풍 같았던 전반전이 지나가고, 이어진 후반은 다소 밋밋했다. 반대편 코너플래그는 이미 관중들로 차 있었다. 나는 별 수 없이 중앙 쪽 스탠드를 찾아 경기를 마저 관람했다. 하지만 시선은 여전히 그에게 가 있었다. 로비 킨이 골을 터뜨리고 특유의 따발총 세레모니를 펼쳤지만, '오!'하고 말았다. 미안해요, 로비 킨.
후반 종반, 나의 영웅이 날카로운 크로스로 도움을 기록했다. 하지만 멀리 있어서 제대로 지켜보지 못했다. 카메라로 찍고 있지 않았던 것이 너무나 아쉬웠다. 경기는 그렇게 끝났다. 3-1. LA 갤럭시의 승리.
오랜 기다림에 비해 너무나 짧은 시간이었다. 단 90분. 허무함이 밀려왔지만, 그래도 그를 가까이서 지켜봤다는 것을 위안 삼으며 경기장을 빠져나왔다. 기운이 빠져 있는 나를 위로해 준 것은 LA 갤럭시 오피셜 샵이었다. 승리 기념으로 무려 30% 세일을 하는 게 아닌가? 경기 시작 전에 구매를 망설였던 자켓을 당장 사버렸다. 그 자켓은 아직까지도 요긴하게 입고 있다. LA 갤럭시 만세!
10년이 넘는 시간동안 사진을 통해, 영상을 통해, 또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내 머릿 속에서 만들어진 영웅이 이날 내 눈 앞에 현실화됐다. 가깝지만 또 아득했던 세계가 비로소 '진짜'가 된 느낌이었다. 직관의 진짜 묘미는 바로 이런 게 아닐까?
이 글을 읽는 여러분께도 추천하고 싶다. 더 늦기 전에 당신의 축구 영웅을 찾아 가보라. 직접 보면, 세계가 바뀐다.
그를 직접 보고 온 이듬해, 베컴은 파리로 건너가 길었던 선수 생활을 마무리했다. 마지막 경기에서 찍힌 사진 속에서 울먹이는 그를 보고 만감이 교차해 한참을 멍하니 바라본 기억이 난다.
처음엔 슬펐다. 아쉬움이 고스란히 드러난 그의 표정을 보고 마음이 아프기도 했고, 더는 뛰는 모습을 볼 수 없다는 생각에 허무하기도 했다. 그리고 다시 든 감정은 '고마움'이었다. 긴 시간동안 나의 영웅으로 있어줘서, 내가 더 축구를 사랑할 수 있게 해줘서 고마웠다. 그라운드에 선 그의 모습은 아마 평생 잊지 못할 듯하다.
글·사진 - 김정희 (前 베스트일레븐 기자)
커버 - YoTuT (CC BY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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