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스 오브 92 (2013) | 다큐멘터리 | 99분
1998/1999시즌.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리그, FA컵, 챔피언스리그를 모두 우승하며 잉글랜드 구단 최초로 트레블을 달성했다.
이는 잉글랜드 축구 역사 뿐 아니라 세계 축구사에 영원히 남을 기념비적인 성공이었다. 당시 맨유에는 최고의 선수들이 즐비했는데, '슈퍼 서브' 올레 군나르 솔샤르, 주장 로이 킨, 최고의 투톱 앤디 콜과 드와이트 요크 등이 모두 퍼거슨 감독의 지휘 아래 맨유의 성공에 이바지했다.
영화 <클래스 오브 92 (The Class of '92)>는 이렇게 찬란했던 90년대 맨유의 이야기를 다룬다. 하지만 맨유의 성공을 보여주려는데 초점이 맞춰진 건 아니다. 맨유가 1999년 챔스에서 우승하기 약 7년 전부터 함께 유스팀에서 뛰었던, 어쩌면 당시 스쿼드에서 가장 평범했지만 특별했던 여섯 남자의 이야기가 이 영화의 포커스다. 솔샤르, 킨, 콜, 요크가 아닌, 데이비드 베컴, 니키 버트, 라이언 긱스, 게리 네빌, 필 네빌, 그리고 폴 스콜스. 영화 제목 그대로 맨유의 '클래스 오브 92'가 이 영화의 주인공들이다.
<클래스 오브 92>는 주인공인 '퍼기의 아이들' 여섯 남자가 직접 나레이션에 참여해 90년대 맨유와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극적 효과를 위해 픽션을 가미하거나 과장하지 않았고 그저 덤덤한 다큐멘터리의 전개를 따라간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작품을 평범한 다큐멘터리 영화로 규정해버리기엔 너무 아쉽다. 전세계 많은 축구팬들에게 감동과 행복, 그리고 전율을 안겨준 90년대 맨유를 직접 그라운드에서 경험한 남자들이 본인의 감정과 생각을 섞어 이야기해준다는 건, 이미 그 자체로 영화의 장르 구분을 무색하게 만드는 매력적인 장치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1992년, 아직 여섯 남자들이 맨유의 유스 선수이던 시점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이들은 줄곧 본인 감정에 충실히, 진정성을 담아 나레이션을 풀어간다. 지금까지 들을 수 없었던 90년대 맨유의 뒷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건 덤이다. 아직 유스 레벨에서 뛰고 있을 때 1군 선수단에 포함되고 싶어 했던 열망, 리그에서 최강의 아스날을 상대했던 경험, 챔피언스리그에서 느꼈던 긴장감 등 경기장에서 직접 뛰었던 선수들만 이야기할 수 있는 그런 내용들 말이다.
이 영화에서 첫 번째로 주목할 부분은 바로 이 지점이다. 사람들은 98/99시즌의 맨유를 환하게 기억하지만, 92년의 맨유나 94년의 맨유는 잘 기억하지 못한다. 트레블이라는 성공이 너무 화려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사자들인 '퍼기의 아이들'에게는 1992년의 맨유도, 1994년의 맨유도 소중하고 특별했다. 그들은 이 영화를 통해 트레블의 맨유 만이 아닌, 사람들이 잘 기억하지 못하는 맨유에 대해서도 비중 있게 이야기한다. 누구보다 생생하게.
이 영화는 <인셉션>처럼 상상력을 자극하는 영화도, <스타워즈>처럼 화려한 비주얼을 자랑하는 영화도, <어벤져스>처럼 입 벌어지는 액션을 보여주는 영화도 아니다. 대신 그동안 스타 플레이어로만 보였던 여섯 남자들을 '사람'으로 볼 수 있는 기회를 준다. 특히 영화 중간중간에 묻어 있는 장난끼와 농담들은 그들이 90년대 맨유를 이끌었던 스타 플레이어이기 전에 역시 평범한 남자들이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이것이 이 영화의 두 번째 매력 포인트이자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가장 큰 이유다.
하루가 멀다하고 신문 헤드라인을 장식하며 전세계 축구팬들의 사랑을 받았던 선수를 미디어라는 여과 장치 없이 있는 그대로 만날 수 있는 기회는 많지 않다. 지금도 인터넷에는 긱스나 스콜스의 인터뷰가 수두룩하게 쌓여있지만 진부하고 자극적인 질문들과 뻔한 답변들로 채워진 경우가 대다수다.
하지만 이 영화에는 자극적인 질문이나 논란을 만들려는 의도가 없다. 그래서 더 신선하고 더 귀기울이게 된다. 그라운드 안팎에서 자신이 경험한 것들을 말하고 싶은 만큼, 말하고 싶은 대로 털어놓는 여섯 남자들의 입에선 그 어떤 가식 혹은 거짓도 느껴지지 않는다. 게다가 이젠 그럴 필요도 없는 게, 다들 그야말로 살아 있는 레전드 아닌가!
예를 들면 영화의 첫 장면부터 이렇다. 98/99 챔스 결승전 오프닝 영상을 여섯이 말없이 바라보는데, 그들의 눈동자는 여전히 그때의 감동을 생생히 기억하듯 상념에 차 있으며 그 자체로 많은 이야기를 하는 것만 같다. 당시 그들이 얼마나 긴장했는지, 그 경기가 어떤 의미였는지,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도 그런 여러가지 감정들을 느끼며 일생일대의 경기를 치러냈다는 걸 느낄 수 있다. 레전드 축구 선수 베컴이나 긱스가 아닌, 인간 베컴과 긱스가 보이는 것이다.
영화 중간중간에는 다함께 한 테이블에 모여 90년 대 맨유와 자신들의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도 담겨 있다. 수다와 웃음이 끊이질 않는다. 지금은 어느덧 40대가 된 그들이 평범한 아저씨들처럼 수다를 떠는 모습은 너무 친근해서 오히려 비현실적이다. 상상이나 할 수 있었나? 맨유 최고의 전성기를 이끈 바로 그 '클래스 오브 92' 선수들이 그냥 보통의 아저씨들로 보인다니. 그라운드 위에 서는 것 만으로 존재감을 뽐내던 그 스타 플레이어들이 바로 앞에 마주 앉아 서로 자기 이야기를 떠드는 보통 사람으로 느껴지다니.
이런저런 이유로 일상에, 혹은 축구 자체에 지쳐 있는 축구팬이라면 잠시 쉬어가는 의미로 편안하게 눕거나 기대 앉아 이 영화를 꼭 한번 보길 추천한다. 그동안 '퍼기의 아이들' 모두를 멀고 먼 스타로만 여겨왔던 거리감이 겨우 한 시간 반 만에 한결 가까워 질 것이다. 심지어 이제는 실제 아저씨들이기도 한 그들이 나와 격 없이 친한 사람인 것 같은 착각마저 불러일으킬 지 모른다. 친구들에게 슬쩍 풀어놓기 좋은 맨유 뒷얘기들을 알게 되는 건 보너스.
글 - 정현수 (축구전문 블로그 프리사이스 패스 운영자)
사진 - 영화 스틸컷, 포스터
교정 - 오늘의 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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