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아우크스부르크, 임풀스 아레나
2012년 12월, 생애 첫 독일 방문 기회가 생겼다.
그 무렵 나는 MBC 스포츠+에서 분데스리가를 중계했고 여자월드컵까지 유심히 챙겨본 터라 독일이란 나라에 대한 관심이 극대화되어 있었는데, 마침 운좋게도 직접 닿을 기회를 잡은 것이다. 비록 업무상 출장이긴 했지만 첫 유럽행, 그것도 '축구와 맥주의 나라' 독일을 가게 된다는 생각에 한참을 들떠 있었다.
하지만 막상 떠나려니 출발부터 조짐이 심상치 않았다. 비행기에 오르자마자 피곤해 잠을 청했는데, 한참을 자고 일어났음에도 나는 여전히 인천공항 활주로에 머물러 있었다. 부스스 정신을 차리고 살펴보니 인천 지역에 내린 갑작스런 폭설로 항공 스케쥴이 꼬여버렸고, 잠에서 깬 뒤 30여 분을 더 기다려서야 비로소 예정 시간보다 3시간이나 늦게 이륙할 수 있었다.
그래도 그 두 시간 남짓 꿀잠을 자서인지, 기내식 덕분인지 곧 좋은 일이 벌어질 것 같은 막연한 기대감이 다시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래, 여행은 이래야지. 얼마나 야근을 거듭하고 탄 비행기인데! 물론 그마저도 연이어 벌어진 두 가지 큰 사건으로 인해 얼마 못가 '악몽'으로 바뀌었지만 말이다.
본격적으로 시작된 악몽의 첫 장은 일단 인천공항에서의 출발 지연으로 인해 네덜란드 스키폴 국제공항에서 독일 함부르크 국제공항으로 가는 비행기가 끊겨버렸다는 점이었다. 어쩔 수 없이 항공사에서 잡아준 호텔에서 하루를 묵고 이튿날 공항을 다시 찾았으나, 네덜란드까지 따라온 폭설 탓에 갈아타야 할 비행기가 세 차례나 취소되어 결국 아침 7시부터 오후 5시 반까지 10시간 반 가량을 공항에 갇혀 있어야 했다.
진심으로 영화 '터미널'이 생각나는 시간이었다.
두 번째 사건은 간신히 도착한 독일 함부르크 국제공항에 내 짐이 도착하지 않은 것이다. 황당.
아마 세 번의 연결 항공편 취소 과정 중 유실된 것 같다는 게 항공사 측의 설명이었다. 결국 나는 독일에 머문 6일 간 단벌 트레이닝 바지와 후드티 차림으로 지내야 했고, 밤마다 속옷과 양말을 빠느라 밤잠을 설쳐야 했다.
이봐 독일 양반, 대체 나한테 왜이래?
설렘으로 가득했어야 할 나의 첫 독일은 그렇게 비행기 연착+짐 유실 콤보를 맞으며 우여곡절 끝에 함부르크 땅을 밟으며 무덤덤하게 시작됐다.
첫 일정이던 함부르크SV의 홈 경기장 '임테크 아레나' 방문도 돌이켜보면 솔직히 별 기억이 없다. 당시 손흥민의 소속팀이던 함부르크SV와 한국에 잘 알려지지 않은 TSG 1899 호펜하임 간의 경기를 보러 애써 경기장을 찾은 건데, 좌석에 앉자마자 현지 유로 스포츠(EURO SPORTS) 방송 카메라에 잡혀 본의 아니게 전 세계로 나가는 전파를 탔다는 점이 유일한 기억이자 추억거리다.
재밌고도 슬픈 사실은, 여행에서 돌아와보니 한국 분데스리가 중계 방송에서 화면에 잡힌 나와 일행을 중국인 관광객이라고 설명했다고... 나야 그렇다 쳐도 형욱이형은 어쩔.
다음 날. 나는 생애 처음으로 방문한 유럽 축구장의 정신 없는 기억을 뒤로한 채 뮌헨으로 향했다. 약 1시간 가량의 비행과 40분의 기차 이동을 더해 마침내 노란 겨자색의 아우크스부르크 중앙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욱국, 이 도시의 첫 느낌은 고즈넉한 분위기였다.
겨울이라 더 그랬을지 모른다.
하지만 차를 타고 숙소로 이동하는 동안 이런 인상이 180도 바뀌었다. 그렇다고 현대적이고 큼직큼직 여유 있는 대도시의 느낌은 아니었지만, 시내로 들어갈수록 아기자기한 상점이며 거리마다 도드라지는 색채 덕에 시내 자체가 마치 커다란 공원 안에 있는듯 했다.
사실 아우크스부르크는 세계대전으로 시설이 많이 파괴되었다가 다시 복원된 도시인데, 역사를 품은 현대적 감각이 전쟁의 아픔마저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키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특히 온 도시 바닥에 깔린 돌들은 거듭 전쟁으로 지워진 고대 로마 제국의 흔적 마저 여전히 담고 있는듯 했다.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짐을 풀고, 곧장 구자철 선수의 경기를 보러 아우크스부르크 홈 경기장 '임풀스 아레나'로 향했다. 참고로 당시 이 구장의 공식 명칭은 맨 위 사진에서 보듯 'SGL 아레나'였고, 최근엔 한 보험사가 구장명에 대한 권리를 사들여 'WWK 아레나'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2015년 7월부터)
아무튼 경기장은 시내 중심지에서 차로 15분가량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었는데, 한국이라면 좁을 법도 한 2차선 도로였음에도 가는 길이 전혀 막히지 않았다. 창밖을 보니 사람들이 뭔가에 홀린 것 마냥 저마다 빨강, 녹색의 유니폼과 머플러를 둘러매고 엄청나게 긴 행렬을 이루며 걷고 있었다. 그들에게 한겨울 걸어서 40분 거리는 축구를 보는데 전혀 문제가 아닌듯 보였다. 사실 그들은 오래 전부터 다니던 길을 평소처럼 걷고 있는 것 뿐인데, 그들의 오랜 축구 역사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내게만 마냥 신기했던 것일지도.
차 안에서 한동안 낯선 광경을 눈에 담다보니 이내 임풀스 아레나에 도착했다. 미리 신청한 미디어 티켓을 발급받고 경기장에 입장하기 전 으레 그랬듯 잠시 메가스토어를 찾았는데, 처음 방문한 이곳에서 뭔가 익숙한 느낌에 확 끌렸다. K리그 경기장에서나 봐 왔던 컨테이너 스토어가 축구의 나라 독일, 그것도 1부리그 분데스리가 팀 홈구장에 있을 줄이야.
물론 이곳이 2010년 이전엔 5천명 남짓 입장 가능한 아주 작은 경기장이었고, 2011 FIFA 여자월드컵이 독일에서 열리기 직전 1만 5천명 가량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로 증축되었음을 감안하더라도 이렇게 조촐한 간이 컨테이너 스토어라니! 너무나 실망스러워 사진조차 남기지 않았던 탓에 글로 밖에 그 초라함을 전달할 수 없음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아무튼 스토어컨테이너에서 구입한 머플러 하나를 목에 두르고 경기장에 들어섰다. 아우크스부르크에서 가까운 바이에른 뮌헨이 원정 온 경기라 더 잔뜩 기대하고 미디어석을 찾아 올라갔다.
그런데 맙소사. 3층 꼭대기에서 가변석으로 한 층 더 쌓아 올린 3.5층쯤 되는 경기장 지붕 바로 밑이 미디어석이란다. 게다가 옆자리 인간들이 경기 내내 줄담배를 피워대는 통에, 경기는 뒷전이고 기침하다 요단강을 건널뻔 했다.
결국 내 첫 유럽 출장, 두 번의 분데스리가 직관은 경기 후 믹스트존에 들어가본 것에 만족해야 할 뻔 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투덜댈 것 투성이였던 출장에서 건진 가장 큰 소득이 있었으니, 그건 엉뚱하게도 구자철과 함께 직접 '캐치볼'을 해봤다는 것이다.
지금은 결혼도 했고 마인츠05로 팀을 옮긴 구자철이지만, 당시 아우크스부르크에서는 훈련이 끝난 뒤 심심할 때마다 팀원들과 티타임을 갖거나 매니저와 야구를 즐긴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인터뷰를 위해 다시 경기가 없는 날, 휴식 시간에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내가 어릴 적 야구선수였다고 하니, 구자철이 거짓말 하지 말라며 직접 확인해 보겠다고 글러브 두 개를 들고 나와 얼결에 진짜 진지하게 캐치볼을 해버렸다.
2012년. 당시 대한민국 축구국가대표팀 주장과 야구를 한 기억 때문에, 웃프게도 나쁜 기억들만 잔뜩인 독일 경기장 직관이 오히려 내게 가장 기억에 남는 경험이 돼버리고 말았다.
글·사진 - 김정남 (풋볼리스트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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