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시드니, 스타디움 오스트레일리아
사람도 동물이고, 오감보다 뛰어난 게 육감이다.
논리가 아니라 직관적으로 생각했던 것을 현실에서 마주했을 때의 쾌감을 느껴본 이들은 알 것이다. 말 그대로 소름이 돋을 정도의 쾌감, 혹은 기쁨.
"이번 출장 대단할 것 같아"
'2015 호주 아시안컵' 취재를 위해 시드니행 비행기를 타면서 혼자 중얼거렸던 말이다. 많은 이들이 럭비와 크리켓 그리고 테니스의 나라인 호주에서 별다른 게 나오겠느냐는 의심을 품을 때, 나는 홀로 즐거웠다. 회사에 팀원들을 남겨두고 홀로 캥거루와 코알라가 노니는 나라로 날아왔기 때문 만은 아니었다. 사실 예선전을 취재할 때만 해도 나의 육감은 이성보다 못하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한국과 호주가 맞붙은 결승전에서 무릎을 쳤다.
'경기장에 들어서는 순간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는 표현은 진부하고, 반쪽자리다.
경기는 경기장에서만 벌어지는 게 아니다. "K리그는 재미없다"는 말을 일견 이해하는 부분도 같은 맥락에서다. 경기장으로 가는 지하철 혹은 버스에 가득찬 팬들, 지하철이나 버스 안에서 갑자기 나오는 응원가 소리. 이런 것들은 국내에서 좀처럼 경험하기 어렵다.
"택시를 탈걸 그랬나"
한국과 호주의 결승전이 벌어지는 스타디움오스트레일리아로 가는 지하철을 타는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겁이 많은 편은 아닌데, 지하철 안이 노란색으로 물든 정도가 아니라 정말 꽉 차있었기 때문이다. 옆에 앉은 이름 모를 승객(유니폼을 입지 않은 동양계 청년)과 눈으로 이런 메시지를 서로 교환했다. '괜찮아요. 아무 일 없을 거예요'
지하철 객차가 흔들렸다. 노란 옷을 입은 호주팬들이 벽을 치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를 봤다. '너는 왜 안불러?'라는 듯한 눈빛이었다. 조용히 가방에서 미디어 카드를 꺼내서 목에 걸었다. '나 기자야. 중립이라구' 그래도 그들의 눈빛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미디어 카드에 국적이 써 있기 때문이었을까? 아주 살짝 무서웠지만, 기분은 좋았다. 축구는 원래 떠들썩한 거다.
지하철이 경기장 역에 도착했다. 좁은 객차 안에서 쏟아져 나온 노란색들이 작은 지류를 형성하더니 이내 큰 강을 이뤘다. 유니폼, 머플러, 가방, 평상복, 신발 등등. 여러 종류의 노란색들이 모여 알록달록한 노란 강을 형성했다.
누군가 노래를 시작했다. 아빠의 어깨에 올라탄 어린이들도 목청을 높였다. 군데군데 빨간옷을 입은 한국팬들도 눈에 띄었다. 축제는 이미 시작돼 있었다.
경기장으로 들어와 기자석에 앉았다. 관중석을 보니 색상의 완벽한 분할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경기장의 대부분을 노란색이 차지했고, 군데군데 빨간색이 들어앉아 있었다. 노란 카레라이스에 빨간 당근이 떠 있는 걸 상상하면 얼추 비슷하다. 이날 최종관중은 75,656명이었는데, 한국팬은 어림잡아 최대 1만 5천명 정도였다.
"선배 쟤들은 응원을 아직 배우지 못했나 봐요"
옆에 앉은 후배기자가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거의 3~4배가 많은 호주팬들의 함성이 한국팬들을 당해내지 못했던 것이다. 경기 초반에는 확실히 "대~한민국" 소리가 컸다. 호주팬들은 뭔가 조직적이지 못했다. 역시 조직문화는 한국이었다. 생면부지의 한국팬들이 만들어내는 "대~한민국" 소리가 경기장을 맴돌았다.
물론 그 공간에서 중요한 건 어떤 팬들이 더 큰 소리를 내느냐가 아니었다. 양측을 합해 몇 명의 팬이 경기장을 찾았는지였다. 거의 8만 명이 지르는 소리를 경험해본 이가 몇 명이나 있을까? 이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소리를 지르고, 그 소리가 다시 경기장 안에 메아리치고. 이런 광경이야말로 경험해보지 않은 이들은 알 수 없는 지경이다. 자신이 지른 소리에 자신이 없어지고, 전체에 수렴하는 경험이라니.
"기자는 중립을 지켜야 해"
2007년, 처음으로 경기장에 취재 가던 날 한 선배가 내게 해준 충고다. 기자석에서 환호하면 안 되며, 박수를 쳐서도 안 된다. 국제경기에서 한국이 큰 승리를 거두더라도 눈에 띄게 좋아하면 안 된다. 나뿐 아니라 기자들은 항상 이런 이성의 영역에 스스로를 가두려 한다.
자랑은 아니지만, 나는 선배가 준 첫 지침을 잘 지키는 편이다. 만원 관중이 들어왔든, 결승골이 나오든, 역전골이 나오든 크게 동요하지 않고 취재를 해왔다. 하지만 고백하자면 이날은 달랐다. 전후반 90분이 거의 끝나갈 무렵까지도 괜찮았다. 호주가 선제골을 터뜨리며 앞서갔을 때도 크게 흔들리지 않았다. 준비해온 준우승 기사를 꺼내 고치려 했을 뿐이다.
그런데 손흥민이 후반 추가시간에 동점골을 터뜨리면서 이성의 벽이 무너졌다. 일어나서 박수를 치진 않았지만 그 때부터 손과 머리는 움직임을 멈췄고, 가슴만 활동했다. 연장 전후반을 합쳐 30분의 유예시간도 얻었겠다, 마음 속으로 '이왕 이렇게 된 거 확 우승해버렸으면 좋겠다'라고 외쳤다.
사실 한국의 우승 기사는 미리 써놓지 않았는데... 일단 비이성의 영역으로 들어가자 경기장의 모든 게 몸 속으로 들어오는 듯 했다. 관중들의 환호, 선수들의 탄식 그리고 기자들이 자판을 두드리는 소리까지 모든 게 펄떡거렸다. 축구를 이해하려는 의지를 버리고 그저 바라보는 순간, 축구 그 자체를 맞이하자 같은 곳에 앉아서도 다른 경험을 할 수 있었다.
경기는 호주의 승리로 끝났다. 한국은 마지막 순간 개최국의 힘을 이겨내지 못했다. 아쉽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지만, 기쁨이 더 컸다. 약 8만의 관중이 경기장을 띄워 올릴듯한 함성을 질렀고, 내가 그 현장에 있었다. 한국의 젊은 선수들이 호주 선수들을 상대로 선전하던 기억, 손흥민이 동점골을 넣었던 순간의 짜릿함은 그대로 내게 남았다.
'축구는 유럽이 아니면 성공하기 어렵다. 아시아는 축구 후진국'이라고 말하는 이들에게 보여 주고픈 경기였다. 경기 전 호주 언론은 기자회견에 나온 주장 밀레 예디낙에게 "잠자는 사자(호주)를 깨울 수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 잠자는 사자, 혹은 캥거루가 깨어나는 것을 목격했다. 호주 사자뿐 아니라 한국 호랑이도 함께 일어나는 것을 봤다.
다른 곳에서 이 경기를 지켜본 서형욱 해설(=풋볼리스트 대표)의 한 마디는 많은 것을 함의했다.
"월드컵 결승전도 이렇게 많은 관중이 지켜보긴 어려울 거다"
그렇다.
나는 아시아축구 최고의 날을 온몸으로 함께했다.
글·사진 - 류청 (풋볼리스트 취재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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