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증발_5
‘증발인 저장소’란 말 그대로 증발인들의 신상을 모아 업로드 된 SNS 채널로 물론 불법이다. 운영자는 증발인들의 신상이 조회대는 대로 무분별하게 업로드하고 이들이 어떤 죄가 있어서 증발된 것처럼 꾸며냈다. 살면서 조금이라도 먼지가 있던 이들은 그 먼지를 커다랗게 부풀렸고 그 먼지 때문에 증발의 벌을 받게 된 것처럼 여론을 펼쳤다. 털어도 먼지가 안나오는 사람들은 그들이 하지도 않은 먼지들을 꾸며내 비난하기도 했다. 증발인 가족들과 측근들이 이들을 고발하려 했지만 해당 플랫폼에서는 운영자를 쉽사리 조회할 수 없는 구조였고 고발이 되어 채널이 폭파되더라도 다시 다른 이의 명의로 계정이 다시 생겨나기도 했다. ‘증발인 저장소’란 하나의 채널이 아닌 ‘증발인 저장소’의 속성을 가진 수십, 수백개의 채널이었던 것이다. 증발 현상에 대한 두려움과 호기심, 그리고 나는 증발인과 다르다며 애써 안도를 갖고 싶어하는 심리는 이런 ‘증발인 저장소’의 확산을 키웠다. 눈에 묻고 싶지 않아서 보일 때마다 거부 표시를 눌렀지만 매번 다른 이름을 한 채 올라오는 것들이었으니 우리 구역내에 없으리란 법도 없었다. 몇 시간이 지나고 어떻게 된 일 인지 최경사에게 물어봤다. 예상과는 달리 때린 남자가 맞은 남자를 ‘증발인 저장소’ 운영자로 오해해서 벌어진 일이었고 피해자는 가해자에게 약간의 합의금을 받은 뒤 선처했다고 했다. ‘증발인 저장소’의 정체에 대해서 온 국민을 넘어 전 세계의 혐오감이 상당한데 누명을 씌우고 폭행까지 가한 이를 선처로 풀어주다니 아리송한 일이었다. 알고보니 가해자는 피해자 여동생의 애인으로, 곧 결혼할 사이라고 했다. 참 기구한 여동생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쯤 여동생이라는 사람이 오빠와 애인을 데리러 왔다. 그런데 그 여동생이 이재숙이었다. 이재숙. 분명 이재숙이었다.
이재숙은 나와 초중고를 나온 동창으로 초등학교 때는 옆 동에 살아 꽤 친했지만 중학교 때부터는 왠지 어색하게 되어 고등학교 때는 아주 모른 척을 하고 지냈던 친구였다. 이렇게 만난 건 고등학교 졸업 후 20년이 가까이 지난 후였다. “도화지?” 이재숙이 나를 불렀다. 내 이름은 도화가 아니다. 도화지는 어린시절 이재숙이 나를 부르던 별명이다. 가래떡, 해골, 류크 등 하얗고 긴 팔다리 때문에 짖굿게 붙은 별명들과는 달리 이재숙은 나를 도화지라고 불렀다. 나는 도화지라는 별명이 다른 별명들과 비교해서 그리 나쁘지 않은 별명이었기 때문에 이재숙이 나를 도화지로 부르건 말건 게의치 않았고 이재숙은 나를 성훈이 아닌 도화지라고 계속 불러댔었다. 중학교 때부터 서로 모른 척하게 되기 전까진 말이다. 오래간만에 도화지라는 이름을 반가워서 좋았다. 그리고 얼떨결에 말한 것이었겠지만 그 덕에 내가 긴장을 풀어줄 수 있게 된 것 같았다. 나는 “재수!” 라고 웃으며 이재숙을 반겼다. 그러자 이재숙은 피식 웃다가 자리에 앉아 엉엉울었다. 애인이라는 작자와 오빠라는 사람은 민망해하며 이재숙을 감쌌다. 이재숙은 오빠의 얼굴을 보고 다시 울다가 계속해서 비는 애인에게 주먹을 날렸다. 애인은 코피가 터졌다. 그가 당황하는 사이 남매는 경찰관 몇에게 빠르게 사죄인사를 하곤 부리나케 나라졌다. 이재숙은 주먹이 매웠다. 이재숙에게 맞아 코피를 흘린 아이들은 적지 않았다. 물론 나도 포함이었다. 나는 애인에게 다가가 익숙하게 코피를 지혈시켰다. 그리고 이재숙 동창이라는 핑계로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인지 알아내기로 했다. 마침 퇴근시간이 다가와 나는 환복 후 이재숙 애인에게 밥을 사겠다며 국밥집으로 데리고 갔다.
순대국밥 앞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는 이재숙의 애인을 보아하니 처음 봤을 때의 울긋불긋한 인상과 달리 차분하게 생긴 미남형 인상이었다. 남자의 눈물엔 괜한 사람을 몰아세운 미안함, 애인에게 버림받을 것만 같은 두려움, 그렇다고 자신을 때려 코피까지 터뜨린 배신감과 수치심, 그리고 수년 전 증발한 형을 인터넷상에서 대역죄인으로 만든 이들에 대한 분노가 서려 있었다. 나는 남자에게 소주를 따라주며 왜 이재숙의 오빠를 오해한 건지 물어봤다. 남자는 수입이 변변찮았던 이재숙의 오빠가 최근 적지 않은 돈이 생긴 걸 알았고 이재숙의 집을 오가다 그가 증발자들의 신원을 조사하고 있는 걸 알게 되었다고 한다. 평소 ‘증발자 저장소’를 증오하던 그는 이재숙의 오빠가 '증발자 저장소'를 운영하는 것이라 오해를 하게 됐고, 이 사달이 난 것이다. 그런데 정말 특이한 건 이재숙의 오빠가 자신이 맞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나는 기억 속에 희미한 이재숙의 오빠를 떠올리며 그가 ‘증발자 저장소’를 운영할 정도로 비뚤어질 싹이 있었던 인간이었는지, 아니면 자신이 하지도 않은 일을 했다고 말할 만큼 머리가 조금 이상하거나 귀가 잘 들리지 않았는지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