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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화랑 Jul 22. 2019

멍청이를 구제해준 8년간 쓴 독서노트

#난그런거몰라요


 우리 엄마는 국민학교 3학년도 채 다니지 못하신 분이다. 딸내미가 공부를 잘하는 것보다 아픈 데 없이 건강하게 자라기만을 더 바라셨다. 의무교육만 충실히 받고 대학교에 진학하는 대신 고등학교 졸업 후 취업을 해서 돈을 벌다 성실한 남자를 만나 결혼하기를 원했다. (내가 대학교에 합격했을 때도 안 갔으면 하셨다.)


 아빠는 국회의원 보좌관이었음에도 워낙 자신의 삶이 더 중요하고 바쁘신 분이라 내게 전혀 관심이 없으셨다.


 가족들 중 어느 누구도 내게 책을 읽으라 한 사람도, 독서의 중요성에 대해 알려준 사람도, 책을 선물해준 사람도 없었다. 나는 그 흔한 신데렐라, 백설공주 같은 동화책 한 권 가져본 적도 읽어본 적도 없이 자랐다. 중, 고등학교 시절에는 시험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읽어야만 하는 경우에만 책을 읽었다. 


 책뿐만 아니라 영화, 미술, 전시 역시 접할 일이 거의 없었다. 키다리 아저씨의 주인공 주디처럼 제대로 된 가정에서, 제대로 된 친구들과 제대로 된 도서관을 접하면서 산 대부분의 여자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아는 것을 나는 몰랐다. 시골에서 자란 이유도 있을 테고, 가정환경 탓도 있으리라. 


 어찌 됐든 용케 대학교에 입학하긴 했지만 친구들과 대화를 나눌 때나 대외 활동을 할 때마다 스스로 아는 것이 별로 없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때부터 자연스럽게 입을 닫기 시작했다.


 나는 세계 문학 전집도 읽어본 적이 없는 문학 문외한이자 4년제 대학생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상식이라곤 거의 없는 사람이었다. 누군가에게 '백치미'라는 소리를 듣는 날에는 자괴감이 밀려왔다. 10년 뒤에 내가 원하는 모습은 똑똑하고 당찬, 멋지고 본받을 점이 많은 커리어 우먼이었기에.


#너는멍청이twit

 

  2008년 5월. 23살. 스스로 멍청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된 결정적인 사건이 있었다.


 매일 생활비와 학비를 벌기 위해 허덕이며 살았던 대학시절. 그 당시 샤프 전자에서 해마다 전액 경비를 지원해 유럽 4개국 문화를 탐방하는 '리얼딕 세계 문화 체험단'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2006년, 2007년에는 서류 탈락의 고배를 마시고, 2008년 드디어 서류 전형에 합격했다. 내 형편으로 유럽이라는 곳은 꿈만 꿀 수 있는 곳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그 꿈에 한 발자국 가까이 갈 수 있게 된 것 같아 기쁨의 눈물을 펑펑 쏟았던 기억이 난다. 절대 이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지. 꼭 유럽을 가고 말 거라고 굳은 다짐을 하며 면접을 준비했다.


2008년. 서류전형 합격 후 쓴 일기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면접을 보러 갔더니 면접 보기 전, 시험까지는 아니지만 간단하게 상식 테스트를 한다고 했다. 어린 왕자를 집필한 작가의 이름, 절규를 그린 화가 이름 등 약 스무 가지 정도 되는 문학 및 예술에 관한 상식 문제였다. 나는 그 스무 가지 문제에 대한 답을 하나도 쓰지 못했다.


 점수=0점. 어떻게 그걸 모를 수 있냐고? 응. 나는 그걸 몰랐다. 생땍쥐베리인지 생텍지페리인지 생텍쥐페리인지, 뭉크인지 몽크인지 몰랐다. 면접을 볼 때도 유럽 문화와 문학예술 소양을 어필했어야 했는데, 나는 그저 돈이 없는 가난한 대학생이라 기회가 없으니 꼭 데려가 주십시오 했다.


 그렇게 유럽 체험단의 꿈은 한여름밤의 꿈이 되었다. 내가 면접관이었어도 기본 상식도 모르는 멍청이를 유럽 문화 체험 단원으로 뽑지 않았을 것이다. (아, 여기서 잠시! 모를 수도 있습니다. 모른다고 멍청이 아니에요. 다만 취지에 맞게 알아야만 했던 상식이었기에 스스로를 멍청이라고 낮춰 생각했습니다.)


아마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스스로를 똥멍청이라고 생각한 것을.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경험도 중요하지만 공부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을. 많이 알면 알수록 더 많이 보이는 법이라는 것. 그래야 더 많은 기회를 잡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즐길 수 있는 것이 많다는 것도. 그렇게 나는 면접 탈락 소식을 들은 날로부터 책을 읽기 시작했다. 조금씩.




#메모독서의시작

 2011년. 26살. 민음사 북클럽에 가입하면 세계 문학 전집 중 원하는 책 3권과 굿즈를 준다기에 북클럽에도 가입했다. 굿즈는 셰익스피어, 프란츠 카프카, 밀란 쿤데라의 일러스트가 그려진 텀블러, 에코백 그리고 두꺼운 노트였다. (당시에는 민음 북클럽을 대표하는 굿즈에 왜 저 세 사람이 그려져 있는지 전혀 가늠조차 못했다.) 노트는 훗날 나의 첫 번째 독서 노트가 되었다. 


2011년 4월. 생애 첫 독서노트. 첫 페이지


 책을 무작정 많이 읽었던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도 그렇다. 멍청이라는 생각이 들어 독을 품고 책을 닥치는 대로 읽는 그런 오기를 가진 사람이 아니다 나란 인간은. 


 신문을 구독해서 읽고, 신문에 나온 추천 도서들을 스크랩 해 추천 도서부터 한 권씩 천천히 읽어 나갔다. 추천 도서 중 읽기 싫은 건 과감히 포기하고 관심 분야의 책을 주로 골랐다. 


 또 책에서 소개한 책이나 인용 문장만 읽었는데도 마음에 와닿은 책을 골라 읽으며 독서의 가지를 뻗어갔다. 그리고 내 지식수준은 대학생이 아닌 중, 고등학생이라는 판단에 고등학생들이 읽는 독서평설도 구입해서 읽었다. 

 (독서평설: 문학과 비문학, 고전과 대학입시 기출 논술, 시사 이슈 등을 실어 놓은 학습서)


독서 노트 두 번째 장


 노트에는 인상 깊었던 문장들을 주로 적었고, 유용한 뉴스 기사와 경제 상식, 강연을 듣거나 전시를 보고 난 후 느꼈던 감정들과 일기를 썼다. 멋지고 훌륭한, 나 자신이 자랑스러운 '된'사람이 되기 위한 모든 것들을 담기로 다짐했기에.


2011년 / 독서평설 / '점술' 칼럼을 읽고
2011년. 재능 기부에 대한 생각


'젊었을 때 고생을 경험할 수 있는 환경에서 태어났기에 이렇게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감사함'


2011년 4월. 박경림의 강연을 들은 후 느낀 점


 2011년도에는 졸업을 앞두고 취업에 대한 불안함이 가득했던 시기였다.


2012년 일기


'노력하지 않으면서 남들과 비교하는 일들은 내게 큰 불행을 안겨주었다.'


2012년 12월 25일. 데일 카네기 성공 대화론


 2012년. 인턴이 끝나고 취업을 준비하던 시기. 계속되는 취업 실패에 자신감이 뚝 뚝 떨어졌다. 이 시기에는 자기 계발서를 주로 읽었다.


2014년 11월 7일 더글라스 케네디 - 모멘트


 2014년 취업한 뒤 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책을 읽어도 머릿속에 잘 기억 남지 않아 등장인물과 인물들의 관계를 적었다.


2014년 인생 그래프 그리기


 자기 계발서를 읽고 인생 그래프 그려보기. 


2015년 김수영,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2015년 기억력도 스펙이다


 책을 읽으면 말도 잘하게 된다는데 나는 여전히 말도 잘 못하고, 책에 대한 설명도 잘 못하는 데다가 기억력까지 좋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읽은 책


2016년 7월 24일 메모 습관의 힘


2016년. 운명처럼 신정철 작가님의 <메모 습관의 힘>을 만났다. 2015년에 출간된 책으로 메모의 중요성과 메모 습관을 유지하는 방법, 메모를 활용할 수 있는 비결 등이 담겨있다. 저자는 책에서 메모 리딩의 효과에 대해 아래와 같이 설명했다.


메모 리딩의 효과 1. 쓰면 더 잘 기억할 수 있다

> 쓰는 행위가 기억력을 향상한다.

메모 리딩의 효과 2. 책과의 만남이 달라진다

> 저자의 생각에 질문하고 내 의견을 제시하면서 '책과 대화를 주고받는 관계'가 만들어진다.

메모 리딩의 효과 3. 글쓰기 실력이 향상된다

> 책의 문장을 끝까지 읽는 습관이 언어의 감각을 키워주고, 글쓰기 실력의 향상으로 이어진다.


이 책을 읽고 지금까지 꾸준히 해왔던 메모 독서가 쓸데없는 행동이 아니었다는 생각에 안도감이 들었다. 읽은 날짜를 적지 않거나, 책을 읽고 느낀 생각과 질문들을 적지 않았던 점들은 보완해야겠다고 다짐했다. 


2018년 11월 17일 박웅현 - 다시 책은 도끼다


2018년. 박웅현 작가님의 <책은 도끼다>, <다시 책은 도끼다>를 접하고 책을 무작정 많이 읽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것. 사유하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 같은 걸 보고 흘려보는 것과 깊이 감상하는 것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배웠다.


내게 울림을 준 문장

1. 울림이 있는 것들과 함께 하면 좋은 점은 무엇보다 삶이 풍요로워진다는 것

2. 같은 것을 보고 얼마만큼 감상할 수 있느냐에 따라 풍요와 빈곤이 나뉜다.

3. 기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감동을 받는 것이다.

- 박웅현, 책은 도끼다 中


1. 책을 왜 읽을까? 아무것도 아닌 것에서 이렇게 우리들의 삶을 위로받을 수 있기 때문에 

2. 지식은 밖에서 들어오지만 지혜는 안에서 우러나온다고요. 사유하는 시간을 갖지 않으면 내 안에서 자생적으로 우러나오는 것들을 못 건져냅니다. 그냥 잠깐이라도 가만히 앉아 있어 보세요. 복잡한 생각들이 한결 정리가 돼요. 사유하는 거죠. 사유는 그래서 중요합니다.

- 박웅현, 다시 책은 도끼다 中


2019년 7월 1일 내 머릿속 청소법


#독서의힘

2014년. 29살. 블로그에 쓴 독후감을 들여다보면.


조지 오웰 - 동물농장


'난 왜 이런 책을 고딩 때 읽지 않았을까? 어째서 나에게 책을 읽으라고 했던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을까? 왜 어렸을 때 세계문학전집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을까..'


서경덕 - 한국 홍보 전문가 서경덕의 세계를 향한 무한도전


'읽으면서 나 자신이 참 부끄러웠다. 책을 뻔뻔하게 읽을 수가 없었다. 독도, 일본의 역사 왜곡, 동북아 공정, 한글, 한국..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그리고 외국인 친구가 물어본다면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이지성 - 리딩으로 리드하다


'나는 물음표를 떠올리는 능력이 없다고 생각했다. 왜 그런 능력이 나에게는 없는 걸까 라는 고민도 많이 했다. 아마도 그 이유가 어렸을 때부터 철학, 역사, 고전과 너무 동떨어져 있었던 것 때문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건 스콧 펙 - 아직도 가야 할 길


'불안했던 내 마음을 치유해준 책'


김혜남 - 심리학이 서른 살에게 답하다


'좋은 부분은 계속 읽고 또 읽어서 더뎌지기도 한다.'


이나모리 가즈오 - 왜 일하는가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나의 집착과 욕심을 조금 덜을 수 있도록 도와준 책이었다면 '왜 일하는가'라는 책은 사회생활에 대한 공포 앞에서 불안에 떨고 있는 내 머리통을 한 대 치게 만든 책이다.'


'한 살 한 살 먹을수록 세상에 왜? 어째서?라는 질문에 확실하게 대답할 수 없는 사건들이 참 많은 것 같다.'


기억나는 문장, 감명 깊게 읽은 책에 대한 줄거리에 대해 설명해보라고 하면 잘 못하겠지만, 메모와 함께 한 독서 덕분에 이 책들을 통해 배운 점, 느낀 점, 내게 끼친 영향은 무엇인지 정확히 말할 수 있다.



#조금씩찾아온마음의변화

 그동안 많은 책을 읽은 건 아니었지만 울림을 주는 책들을 만나면서 스스로를 대하는 태도가 조금씩 달라졌다. 책을 통해 위로를 받았고 희망을 보았다. 그러면서 내게 조금씩 변화가 찾아왔다.


1. 내 마음 들여다본다

 직장 상사로 인해 큰 충격으로 퇴사를 하고 약 1년간 사람들을 피했던 시기가 있었다. 매일 우울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고, 지하철만 타도 가슴이 벌렁벌렁 거려 숨이 터질 것만 같았다. 정신과에는 가보지 않았지만 병명은 우울증 혹은 대인기피증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시기에는 모건 스콧 펙의 <아직도 가야 할 길>, 김혜남의 <서른 살이 심리학에게 묻다> 등 심리학 의·박사 또는 정신과 의·박사의 책으로 도움을 많이 받았다. 그들이 치료했던 환자들의 사례와 진단을 스스로에게 적용해보면서 힘들었던 시기를 잘 극복할 수 있었다.


 우울하고 슬플 때마다 나를 괴롭게 하는 것들을 노트에 적으며 내 마음을 들여다보았다. 인생은 계획하고 바라고 예상했던 대로 굴러가지 않으며, 예기치 못한 일이 발생하기도 하고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기 때문에 욕심을 버리고 하루하루 행복하게, 모든 일에 감사하며 살기로 다짐했다.


2. 생각이란 것을 하게 됨

 아직도 기억나는 순간이 있다. 대학교 때 우연히 버스에서 고등학교 동창을 만나 대화를 나누는데, 친구가 당시 대통령과 독도 문제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했다. 나는 그 의견을 듣고 난 뒤 친구에게 이렇게 물었다. "그런 생각은 어떻게 해야 할 수 있는 거야?" 이불 킥 할만한 질문. 정말 궁금했다. 


어떻게 해야 정치, 역사에 대한 주제를 두고 자신의 의견을 말할 수 있는지 그 자체가 궁금했다. 나는 그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왜 좋은 건지 왜 나쁜 건지조차 몰랐으니까. 하지만 책을 통해 역사, 경제, 문화, 예술 등에 대해 배우면서 뭐가 옳고 그른지 하나둘씩 알게 됐다. 한두 문장이라도 느낀 점을 메모해두니 생각이 조금씩 쌓이기 시작했다.


3. 타인에 대한 이해

책을 통해 나와는 전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의 삶을 간접적으로 경험하면서 이전보다 상대방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졌다. 다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위해 노력하게 됐다.


"한 사람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적어도 무작정 혐오하기는 어렵다. 누구라도 그러리라 생각한다. 서로 아무런 삶의 연결고리가 없을 때 더 쉽게 혐오하지만, 서로의 삶이 한 자락이라도 섞이면 이해하고 공감할 여지는 꼭 생긴다."

은유 <다가오는 말들 中>



#마무리

 8년이라는 시간 동안 읽은 책이 100권도 채 안 될지라도 책 덕분에 인생이 달라졌다. 단순히 책을 읽은 덕분에 지식이 쌓여 똥멍청이가 평민이 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가장 큰 변화는 스스로를 똥멍청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태도다. 예전과 지금의 지식 크기 차이가 별반 다르지 않을지라도. 있는 그대로 나를 받아들이는 태도. 그리고 나보다 더 멋지고 나보다 훨씬 똑똑한 사람들이 있는 이 공간에서 이렇게 글을 쓸 수 있는 용기. 내 생각이 틀리더라도 의견을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자신감이다.


 책을 가까이한 덕분에. 생각을 하기 시작하면서. 글을 쓰게 되면서. 나를 알아 가면서.


 넷플릭스나 유튜브의 유혹에 끊임없이 휘둘리고 있지만 그래도 여전히 책을 놓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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