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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화랑 Jul 31. 2019

[도서리뷰] 잊기 좋은 이름, 김애란

당신을 스쳐간 이름들을 기억하며


 등단 17년 만의 산문집. 김애란 작가님의 『잊기 좋은 이름』을 디지털 필사를 하면서 읽었습니다. 난생처음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필사한 책. 필사를 결심한 이유는 김애란 작가님의 표현방식이 마음에 들어서였습니다. 그래서 한 권을 다 읽는 데까지 한 달이나 걸렸어요. 저는 아무래도 한 달에 5권 이상은 읽기 힘든 사람인가 봅니다.


 예를들면,

그 장소가 내게 주는 것들을 나는 공기처럼 들이마셨다. (그 장소-어머니의 손칼국수 가게 '맛나당')

그곳에서 나는 여러 계층과 계급, 세대를 아우르는 인간군상과 공평한 허기를 봤다. (그곳-'맛나당')

그곳은 보물창고라기보다 눈으로 열심히 호미질을 해야 하는 자갈밭에 가까웠다. (그곳-헌책방)

그것은 설명보다 충동에 가깝고 힘이 세지만 섬세하지 못하다. (그것-부사)

부사안에는 뭐든 쉽게 설명해버리는 안이함과 그렇게 밖에 설명할 수 없는 안간힘이 들어 있다.


와 같은 표현들처럼 상상을 불러 일으키는 섬세한 문학적 표현 방식은 막상 글을 쓰려고 하면 자연스럽게 나오지 않는 표현들이거든요. 이런 표현 방식을 배우고 싶었습니다.



 눈으로 빠르게 읽어 내지 않고 필사를 하면서 읽다 보니 문장을 두 세번씩 반복해서 읽게 되더군요. 덕분에 작가님과 그리고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한층 가까워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도 모르게 애정도 생기고요.


 1부 '나를 부른 이름'은 저자의 성장과 처음 한 말과 평생 쓸 말을 가르쳐준 부모님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있으며 산문의 뿌리가 되어 줍니다.


 부모님이 소개팅을 하셨던 장소, 부모님이 입맞춤을 하던 밤, 작가님을 갖게 된 과정까지 묘사가 되어있어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TMI가 아닌가 싶었지만 읽다 보니 어느새 저도 모르게 작가님의 시선을 따라가고 있더라고요.


 106p. 몇 년 뒤 결국 두 사람은 살림을 합쳤고, 첫딸을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서로를 껴안았다. 그리고 그렇게 둘 사이를 오간 호흡 속에서, 허풍과 약속 안에서, 노동과 낙관 속에서 태어난 게 나다.


 저라면 '몇 년 뒤 두 사람은 살림을 합쳤고, 첫딸을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를 낳았다'로 끝났을 텐데. 

위와 같은 문학적 표현 덕분에 저 짧은 한 문장 안에서 부모님의 인생이 고스란히 느껴졌습니다. 



 2부 '너와 부른 이름들'에서는 저자가 애정하는 동료 문인들과 자신의 주변에 대한 글이 담겨있는데요. 저자가 애정을 담아 쓴 그 글의 주인공들이 부러웠습니다. 누군가에게 기쁨을 줘야 한다면 직접적인 표현 대신 이렇게 문학적인 표현 방식으로 애정을 담아 글을 선물하고 싶다는 생각도 했어요.


 2부에서는 박완서 작가님과 그분의 책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있는 '말주변에서 말주변 찾기' 챕터가 인상 깊었습니다.


 177p. 나는 선생의 인물들이 아무렇지 않게 내비치는 저 불합리한 합리, 핏기 어린 모순을 애정한다.


 178p. 『닮은 방들』을 즐기는 방법으로 여러 가지가 있다. 당대의 구체적인 물가와 물건의 이름, 사람들 말씨를 통해 그 시대의 공기를 쐬어보는 법도 있을 테고, 손으로 작품의 구조를 훑어가며 조형미를 느껴보는 식도 있을 것이다. 혹은 저 여성의 불만을 소설의 불만 혹은 소설의 욕구로 바꿔 읽어보는 것도 어떤 창작에게 '소재'란 단순히 이야깃거리가 아니라 오히려 자신이 다루려 하는 대상 바깥에 있는 자장들, 이야기가 되려 하거나, 되게 하는 조짐이 모인 장소를 가리키는 말인 경우가 많으니 말이다.



 3부 '우릴 부른 이름들'에서는 문학 관련 글과 개인적인 경험을 담아냈습니다. 그중 세월호에 대한 글 앞에서는 잠시 읽기를 멈추게 되었어요. 저자의 표현대로 아는 얘긴데, '작가가 그 낯익은 서사의 껍질을 칼로 스윽 벤 뒤 끔찍하게 벌어진 틈 사이로 무언가를 보여줘서. 그렇지만 완전히 다 보여주지는 않아서'였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267p. 지난달 16일, 언제 침몰할지 모르는 배 안에서 한 여고생은 불안을 떨쳐내려는 듯 친구에게 밝은 목소리로 물었다.


 "기울기는 어떻게 구하더라?"


 그러곤 그 농담을 끝으로 다시는 이곳에 돌아오지 못했다. 요즘 나는 자꾸 저 말이 어린 학생들이 우리에게 마지막으로 건네고 간 질문이자 숙제처럼 느껴진다. 이 경사를 어찌하나. 모든 가치와 신뢰를 미끄러뜨리는 이 절벽을, 이윤은 위로 올리고 위험과 책임은 자꾸 아래로만 보내는 이 가파르고 위험한 기울기를 어떻게 푸나.



 '잊기 좋은 이름'을 읽으며 이름을 부르다 실패한 시간과 드물게 만난 눈부신 순간을 함께 여행하는 동안 내 안에 '빈공간'에 김애란 작가님이 그동안 느낀 시간과 감정이 들어와 자리를 채워주었습니다.


 산문집은 처음 읽어 봤는데 굉장히 매력적인 장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특히 소설가의 산문집이라면 더더욱이요. 저자의 모든 경험과 관찰이 소설에 배어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하니 좋아하는 소설가의 산문집이라면 꼭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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