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치매 환자입니다(2)

by 채수아

십여 년 전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사 남매 중 아버지를 가장 많이 닮은 저는, 아버지처럼 책을 좋아했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으로 살아가는 사명에 무척이나 감사했습니다. 사기꾼에게 가장 잘 속는 직업이 교사라는 말을 얼핏 들은 적이 있는데, 그렇게 아버지와 나는 세상 물정엔 어둡고, 사람은 믿어주는 성향이 강했지요. 아이들을 믿었고, 주변 사람들을 그냥 믿어주는 습관으로 인해, 아버지도 저처럼 마음 아픈 일들이 있었을 것 같습니다


돌아가셨어도 제 인생 멘토이신 아버지를 떠나보내는 장례식장에서, 처음으로 아버지께 감사했다고, 사랑한다고 고백했습니다. 왜 살아계실 때 그 말을 못 했을까요. 아버지나 엄마나 자식을 무척이나 사랑하셨지만, 말로 사랑한다고 하는 분들은 아니셨고, 저 또한 그런 말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엄마께 전화를 하다 끊을 때는 꼭 사랑한다고 말했습니다. 처음에 깜짝 놀라 몇 초간 침묵하셨던 엄마는, 당신도 우리 큰딸을 많이 사랑한다고 하시더군요. 몇 번을 그러시다가 엄마가 제게 먼저 사랑한다고 말씀하시는 걸로 순서가 바뀌었습니다. 그 이후 모든 자식들과 며느리, 사위, 손주들과 통화할 때 엄마는 먼저 사랑한다고 하셨습니다. 지난 토요일 엄마는 제 옆에서 손을 꼭 잡고 앉으셔서, 우리 큰딸 너무 예뻐, 우리 큰딸 복덩이라고 하시다군요. 복덩이란 말은 처음 듣는 단어였어요. "넌 자랑스러운 딸이야, 넌 거저 키운 딸이야." 그 말은 수백 번 들었지만, 엄마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우리 복덩이라고 하셨습니다


몇 시간 동안, 엄마 집에서 살고 있는 큰 오빠와 제 남편과 웃으며 대화를 하고 있었는데, 엄마가 갑자기 노래를 부르셨습니다.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우리 모두는 손뼉을 치면서 엄마와 그 노래를 함께 불렀습니다. 엄마 작사 작곡이라고 제가 크게 웃으며 떠들었습니다. 그날 엄마와 함께 부른 '감사송'은 한 50번 정도 되는 것 같아요. 가족 모두 노래방에 가면 기본 열 곡을 부르시는 엄마에게, 그런 짧은 사랑송 작사 작곡은, 어쩌면 꽤 쉬운 일이었을 겁니다.


집에 돌아와 그다음 날에 엄마와 통화한 후 이어 오빠와 통화했더니, 엄마는 큰딸과 사위가 다녀간 걸 기억하지 못한다고 하더군요. 옛날 일은 잘 기억을 하는 편인데, 조금 전의 일을 까맣게 잊는 겁니다. 작은방에서 잠을 자는 오빠 앞에서, 새벽에 바라보고 계신 적도 있고, 오빠 옷과 수건을 엄마 장롱 속에 숨겨두기도 한답니다. 그리고 수건을 아줌마(요양 보호사 집)가 훔쳐 간 것 같다고 하신다는군요. 엄마가 숨겨놓는 장소가 일정하여 오빠는 잘 찾아내곤 하겠지만, 순간순간 오빠가 느낄 그 마음이 안쓰러워 마음이 아픕니다. 오빠는 건축 일의 책임자로 일하다가 회사 대표의 부탁을 뿌리치고, 엄마를 위해 자기의 하루를 온전히 바치며 살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죽고 나면 우리 집의 운전수는 우리 장남이니, 엄마나 동생들을 잘 챙기고 살라는 아버지 엄명을 오빠는 절대 잊지 않더군요.


그런 효자이기에 올케언니도 꽤나 힘들었을 겁니다. 같이 살지는 않았어도, 효자 남편은 아내를 자주 외롭게 할 수 있으니까요. 집에는 가끔 들르고 주로 엄마와 함께 살고 있는 오빠가, 참 고맙고도 안쓰러워 남편과 오빠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습니다. 오빠의 돌봄으로도 안 되는 상황이 되면 오빠도 포기하겠지만, 오빠는 말합니다. 중풍으로 4년을 누워계신 아버지를 혼자 힘으로 보살피신 엄마인데, 그에 비하면 자기는 아무것도 아니라고요.


큰 오빠는 사춘기를 제대로 겪었습니다. 그 방황에 아버지와 엄마는 마음고생이 컸습니다. 동네의 존경받는 선생님으로 사셨으니, 아버지는 더욱 괴로우셨을 겁니다. 자애로우시면서도 엄하신 아버지, 그저 품는 엄마, 그 사이에서 오빠의 방황은 몇 년 이어졌고, 우리 동생들도 불안감을 느끼고 살았습니다. 그랬던 오빠가 군대에 가더니 갑자기 사람이 변하더군요. 아니 변한 게 아니라, 원래 오빠의 모습을 찾았다고 하는 게 맞을 겁니다. 군에서 받는 적은 월급을 한 푼도 쓰지 않고 부모님께 보냈고, 참회의 편지를 자주 보냈습니다. 사랑 많으신 부모님은 얼마나 감사했을까요. 그 이후 오빠 나이 예순여섯, 지금까지 오빠는 1등 효자, 동생들에게 사랑을 넘치게 주는 아버지 같은 존재로 살고 있습니다. 사춘기를 심하게 겪은 큰오빠 영향으로 남은 셋은 매우 조용하게 청소년 시절을 보내기도 했지요


아버지와 엄마가 결혼해 아들 둘과 딸 둘을 낳으셨고, 그 사 남매가 아홉 아이를 낳았습니다. 제가 셋을 낳았으니까요. 오늘 하루가 지나고, 일 년이 지나고, 몇 년이 흐르고, 어느 한 날 엄마도 아버지 계신 하늘나라로 떠나실 겁니다. 비록 우리가 다녀온 걸 기억 못 하신다 해도 엄마를 자주 뵈러 가자고 남편과 약속을 했습니다.


또 오늘을 삽니다.

감사로 이 하루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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