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치매에 걸리기 전의 일이다. 친구들을 만날 장소가 친정 근처라 '모자와 과일'을 사 가지고 엄마를 먼저 만나고 나왔다. 빨간 모자가 엄마와 잘 어울려서 기분이 좋았다. 엄마와 포옹으로 인사를 나누고 나오다가 경비 아저씨께도 과일 선물을 드렸다.
"저 407호 큰 딸이에요. 저희 엄마 잘 부탁드립니다. 평소에도 엄마께 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렇게 말씀드리고 나오려는데,
"아, 407호요? 할머니께서 그러시던데, 돌아가신 아버님께서 대학 총장님이셨다면서요?"
나는 깜짝 놀랐지만 태연하게 네,라고 대답하고 경비실을 나왔다.
교장 선생님이셨던 우리 아버지는 언제부터 총장님이 되신 걸까? 기분이 묘했다. 엄마가 가끔 거짓말을 하셔서 나를 속상하게 할 때가 있었는데, 따지고 싶지 않았고, 형제들에게도 말할 필요성을 못 느꼈다.
그 순간, 몇 년 전의 아주버님 모습이 떠올랐다. 시어머님의 급작스럽고 이상한 행동에 두 며느리와 딸이 화가 많이 날 일이 있었는데, 아주버님께서는 그 상황을 아무렇지 않게 바라보셨다. 그냥 무조건 이해하자는 식으로, 마치 시어머님을 아기 바라보듯이 말이다. 아주버님의 그 마음이 비로소 이해되던 순간이라고나 할까? 그건 중요한 게 아니라는 생각과 함께 엄마의 행동이 아무렇지 않게 느껴졌다.
내가 나이가 드나 보다. 거짓말을 가장 싫어하던 내가 많이도 변했다. 예전에는 이해하지 못했던 것들이 하나하나 이해가 되기도 하고, 화를 낼 일에 화가 나지 않는 나를 종종 발견한다. 그래서 나이가 든다는 건,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사랑했던 사람들이 하늘나라로 떠나가고, 대학 나온 아버지보다 머리가 더 좋았던, 초등 졸업의 우리 엄마가 치매 환자가 되어 있는 현실은, 가끔 나를 울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