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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수아 Jan 21. 2023

1/N


교대에 다닐 때 담임 선생님처럼 우리를 돌봐주시던 교수님이 계셨다. 나는 국어 교육과였으니 국어과 교수님이 담당하셨는데, 나를 지도해 주신 또 한 분의 교수님이 계셨다. 바로 E.R.C.(영어 연구회) 동아리 지도 교수님이셨다. 국어와 영어 과목을 특별히 좋아했던 나는 그 동아리에 들어가서 교육학 원서를 공부했다. 굉장히 지적이시고 친절하신 교수님은 모든 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으셨는데, 아쉽게도 중간에 캐나다로 유학을 떠나시게 되었다. 그리고 다른 교수님이 우리를 지도하시다가 다시 그 교수님이 우리 학교로 돌아오셨는데, 강의 중에 캐나다에서 생활하던 이야기를 잠깐씩 들려주셨다.


그중 한 가지가 '더치페이'에 대한 것이었는데, 친하게 지내던 부부의 초대를 받고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마치고 나오는데, 그 아내가 그날의 식사비는 자기가 계산하겠다고 말하며, 다음에는 남편에게 계산하라고 말했다고 한다. 다른 사람들을 보아도 식사 후 1/N이 자연스러워 교수님도 나중에는 그것이 익숙해지셨다고 했다. 지금으로부터 37년 전에 들은 이야기이니, 그 말씀을 듣고 있던 학생들은 모두들 이해불가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지금도 나는 1/N로 계산하는 일이 많지 않다. 보통은 모임에 나가도 돌아가면서 식사비를 내는데, 한 모임만 1/N로 하고 있다. 내 삶에서 1/N이 정확히 적용된 때는 시어머님과 관련된 것이 많았는데, 행사에서 나온 비용을 형님과 둘이서 똑같이 반씩 계산을 해온 것이다. 이혼을 하고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던 시누님은 늘 열외였고, 나중에 경제적으로 안정이 된 후에도 그건 계속 유지되었다. 시누님은 본인이 할 만큼 어머님께 따로 선물을 드리곤 했다. 마지막 1/N은 말기 암에 걸리신 어머님에 대해 쓴 비용을 삼 남매가 몇 번에 걸쳐 형님 통장으로 입금을 했던 일이다. 당연히 병원비와 간병비가 포함되었고, 작은 파스 하나, 연고 하나, 물티슈 하나까지 그 비용에 포함이 되었는데, 우리 부부와 시누님은 소소한 것들은 그냥 자기 스스로 해결했다. 그런 와중에 평범한 인간이었던 나는, 결혼 시작부터 어머님을 모시고 살아온 내 힘들었던 삶과 혼자서 어머님께 드렸던 많은 돈들이 떠오르며, 마음속에서 서운함이 물밀듯이 솟아올라 자주 마음을 다스려야 했다.


또한 삼 남매만 모여서 결정을 할 때가 많았는데, 거의 아주버님의 의견이 많이 반영이 되었다. 어머님의 작은 아파트를 판 돈을(어머님은 입원 중이셨고, 상태가 위중하셨고, 돌아가시기 얼마 전이었다) 아주버님이 나와 한마디 상의도 없이 1/3로 나누어 입금을 하셨다. 20여 년 전, 우리와 함께 사시던 어머님이, 주말에 하루라도 쉬고 싶은(시골에 다녀오신다 해도) 집을 어머님 마음대로 계약을 하셨다. 계약금 500만 원은 내가 어머님께 통장으로 만들어드린 목돈으로 해결하셨다. 아파트에 필요한 나머지 돈과 여러 살림들을 장만하느라 사들인 총액의 1/2을 입금하라는 형님 전화 한 통에, 나는 학교에서 대출을 받아 몇 년에 걸쳐 갚았었다. 그걸 다 아시면서도 나는 남편을 통해 통보를 받은 것이다. 그때도 말 한마디 안 하고 넘어갔지만, 나는 몹시 서운했었다. 왜 나는 그때그때 해야 할 말을 못 하고 살았을까.


그런데 감사할 일은 이미 어머님 콘도처럼 준비되어 있던 그 집이 있어서, 내가 건강을 완전히 잃은 후에 17년의 합가 후 분가가 그나마 좀 쉬었다는 것이다. 참 힘든 시집살이였지만, 나는 분가 후 10여 년 동안 어머님의 깊은 사랑을 철철 넘치게 많이 받았고, 서로가 서로에게 감사하며 살 수 있던 것이다. 생각해 보니 1/N이 아니라, 한 푼도 못 받았다 해도, 감사할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던 집이었다. 역시 남는 건 감사와 사랑뿐이다. 그걸 알고 살 수 있으니 이 또한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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