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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수아 Apr 28. 2023

우리 아버지

좋은 일들이 이어지면 늘 돌아가신 아버지가 그리워집니다. 나보다 더 우리 아버지를 사랑했을 것 같은, 아버지의 첫 제자인 한 시인님(목사님이기도 한)의 작은 책자를 들여다보는 새벽입니다.


다음은 아버지 정년퇴임(1995년 여름)을 기념한 시집 <시와 사랑>에서 발췌한 시와 글입니다.




채 용석 선생님께


이번 책은 정년이 되어 교단을 떠나시는 정남국민학교 채 용석 교장 선생님께 드리는 글입니다. 평생을 제자 교육에만 몸 바쳐 오신 그분은 자상하기가 어머니 같으셨고, 엄하기가 아버지 같으셨습니다.


선생님은 점심 굶는 제자들을 위해 도시락을 내놓으셨고, 중학교에 못 가는 제자들을 위해 봉급을 내어 놓으셨습니다. 그래서 연말에는 성탄카드와 연하장을 가장 많이 받으셨는데, 편지가 아무리 많아도 선생님은 일일이 답장을 쓰셨습니다.


영원히 늙지 않을 것처럼, 제자들을 위해 해가 짧다고 뛰시던 선생님이 벌써 정년이라니 믿기지가 않습니다.


(중략)


오직 좋은 제자를 만드는데 지나칠 정도로 진실하셨던 선생님! 그분은, 이 시대의 영악진 사람들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자신을 앞질러 갔지만 동요하지 않으셨고, 바보처럼 자기 길만 걸어간 교육자이셨습니다.


(중략)


그분은 진심으로 학교를 사랑하셨기에 출근을 하셨고, 제자를 사랑했기에 교단에 섰습니다.


(중략)


나는 그분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을 드리고 싶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이 책에 마음을 담아 그분에게 드리는 바입니다. 내내 건강하소서.




밤나무 선생님


                                최 세균


나는 그분을

밤나무 선생님이라 부르겠다.


밤나무 꽃만큼 진한 향기가 없다면

35년 전 밤나무 교실에서

우리가 맡았던 선생님 냄새는

밤꽃 향기 그것이었다.


밤나무 잎만큼 푸른 그늘이 없다면

그때 우리가 보았던 선생님 그림자는

밤나무 그늘 그것이었다.


그래서 그분은 밤나무 선생님이다.

그분이 정년퇴임을 하여 학교를 떠나도

그분은 여전히 밤나무 선생님이다.


밤가시처럼 뜨거운 회초리가 없었다면

알밤처럼 잘 여문 제자들이 있었을까?


금년에도 밤나무 동산에 가을이 오면

나는 보겠네, 그 사랑의 침묵을.


모든 것을 쏟아 놓고 서 있는

거목의 그 주름을 보겠네.




35년 전이다.

선생님 덕분에 나는, 가장 배고프고 힘들었던 유년기를 너무나 행복하게 보냈다. 좋은 추억거리가 되려고 했는지 몰라도, 그 해에 우리는 거의 반년 이상을 밤나무 밑에서 공부를 했다. 안성 고삼저수지 마무리 공사에 학교가 물에 잠겼기 때문이다.


푸른 밤나무에 걸려있는 칠판을 붙들고,

우리로 하여금 잠시도 한눈팔 수 없도록 치열하게 공부를 가르치시는 선생님에게서

나는 밤나무의 품을 보았다. (그 당시는 중학교 입시가 있던 시절이었다) 밤나무는 그늘이 참 넓었다. 그늘은 밤나무 그늘보다 더 넓었다.


선생님을 만난 사람은 모두 훌륭하게 되었다.

그 선생님이 이제 정년퇴임을 하신다. 후회 없이 지켜오신 강단을 돌아보실 수 있는, 이 시대의 흔치 않은 스승이다.




밤나무 교실


                                           최 세균


선생님

빗방울이 떨어져요.

칠판을 옮길까요?


밤나무 교실에 비가 오면

우리는 칠판부터 옮겨야 했다.


칠판 따라 옮겨 다니던 교실에는

매미 소리가 가득했지만


선생님은 언제나

더 큰 소리로 공부를 가르치셨다.


그해 따라 밤나무 숲에는 매미소리가 요란했던 것 같다.

새소리 풀벌레 소리도.




우리는 그 속에서 선생님 소리만 골라 들었다. 언제나 우렁차서 모든 소리를 제압하시던 선생님의 음성을 고르는 일이 그래서 어렵지 않았다. 하늘에는 흰 구름이 뭉게뭉게 흘러가고 밤나무 푸른 잎이 바람에 흔들리던 산기슭. 거기서 우리는 하늘을 보며 공부를 했다.


지금 생각하니 그건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매우 ‘산만’ 한 것이었다. ‘얼마나 공부를 가르치기 힘드셨을까’를 그때는 몰랐다.


내가 목사가 되어 예배를 인도하던 어느 날, 어린아이 하나가 왔다 갔다 하는 바람에 설교를 중단한 일이 있었다. 그런데 선생님은 그때 한 번도 공부를 중단하신 적이 없으셨다.


까치가 날고 비행기가 지나가고 마을 사람들이 들여다보고. 그래서 우리는 늘 두리번거렸는데, 선생님은 어떻게 그리도 묵묵히 공부만 가르치셨을까.


그때 우리는 비록 교실이 없어 밤나무 밑을 전전했지만, 참 많은 것을 배웠다. 그

래서 밤나무 교실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고삼 저수지 수문을 닫기도 전에, 새로운 교사를 완공하기도 전에 우리들의 정든 교실은 물에 잠기고, 학급별로 칠판 하나씩을 들고 몰려다닐 때, 우리 반 칠판은 내가 맡았었는지 빗방울만 떨어지면 나는 칠판 걱정을 했다.


꼭 내가 반장이라기보다 어린 마음에도 칠판이 소중한 줄 알았던 게다. 하긴 우리 학급은 오직 칠판 그거 하나였고, 그것이 걸린 곳이면 어디든지 교실이 되었으니까.


그 해 따라 비가 자주 왔던 것 같다. 하지만 선생님은, 어디서고 칠판만 있으면 신들린 듯  공부를 가르치셨다.


        - 「시와 사랑」최 세균, 1994년 9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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