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안 맏이

by 채수아

결혼을 하니, 서로 생일을 챙겨주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내가 살아온 환경과 너무나 달라 이상했다. 남편이 말했다. 결혼 후 형수가 생일 선물을 준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꼭 생일 전에 만날 일이 있으면 생일 날짜를 말하더라고, 그리고 생일이 지나면 깜빡했다고 하더라고, 그게 매년 반복이 되고 있다는 말에 나는 거짓말 같다고 웃었다. 집안 분위기가 그렇다 해도, 한 사람의 탄생을 축하하는 일은 소중한 일이라는 생각에, 나는 조카들까지 생일을 챙겨주었다. 그건 당연히 친정에서 해오던 일이었다. 시댁 식구들은 고마워하며 서로 생일을 챙겨주기 시작했고, 생일 모임은 어머님 말기암 진단받기 전까지 이어졌다. 아주버님 생신 때는 남편이 따로 만나 술을 사드렸고, 어머님이 입원 중이신 기간 중에 있던 형님 생일엔 잠깐 고민하다가 형님 스카프와 아주버님 손수건을 사서 병실에서 드렸다.


어머님은 돌아가셨다.


그동안 모든 것이 이상하게 돌아가는 분위기여서 마음이 많이 아팠다. 하늘나라 어머님께 죄송한 마음도 들었다. 어머님 삼우제를 치르고 돌아오던 날, 형님은 우리에게 선포를 했다. 아주 오래전 시동생에게 어머님을 절대 모시지 않겠다고 씩씩하게 선포한 것처럼, 앞으로 명절도, 제사도, 각자 알아서 따로따로 하자고 씩씩하게 말했다. 우리 부부의 충격도 컸지만 시누님의 충격은 굉장히 컸다. 그래서 엄마 잃은 아이처럼 많이 울고 많이 외로웠다고 했다. '각자'라는 그 말이 너무나 서러웠다고, 이젠 자기는 친정이 없어졌다고 했다. 나는 우리 두 집이라도 같이 움직이면 된다고, 형님 외롭게 하지 않을 거라고 말했다. 어머님 49재 때도 교회에 다녀서 안 간다는 형님네는 가지 않고, 시누님네와 우리 가족만 다녀왔다.


어머님 편찮으신 기간에 이어 장례식까지, 그 이후에도 맏이 부부의 행동으로 우리 세 사람은 가슴이 몹시도 아팠다. 돌아가시기 전에 어머님 아파트 열쇠를 가지고 집을 들락거리며 어머님 통장에 손을 댔다는 걸, 간병인 입을 통해서 나중에 들었다. 남의 집안일이라 입 다물고 살았지만, 옆에서 지켜보기가 참 속상했었다고, 어머님 돌아가시면 형제들이 의절하게 될 것을 예측하고 있었다고도 했다. 아주버님이 미리 예고하던 '정산'을 할 때, 그분들이 썼다는 돈을 눈에 띄게 부풀린 것이 쉽게 보여 너무나 안타까웠던 기억도 있다. 어머님 돌아가시던 밤, 눈을 감으시자마자 어머님 핸드백이 든 박스를 자기 둘째 아들에게 주며 아빠차에 실으라고 했다는 말을 시누님께 나중에 들었다. 나는 정신없이 우느라고 전혀 몰랐던 사실이다. 어머님의 핸드백에는 입원하실 때 넣고 온 현금과 병실에 온 사람들이 주고 간 돈봉투가 들어있었다고 했다. 참 많은 것을 알고도 우리 세 사람이 모른 척했던 건, 오로지 어머님 때문이었다. 다툼으로 시끄럽게 하지 않으려고 무진장 애쓰면서 그렇게 어머님을 보내드렸다. 내 남편의 부조금 봉투가 장부보다 열다섯 개가 모자랐지만(봉투 수로 정산을 해서 돈을 분배했고, 돈과 봉투 모든 것을 맏이 부부가 계속 갖고 있었다) 그것도 내색하지 않았다. 간병하던 분 표현으로 '돈독이 오른 사람들'이었다. 여기에 쓰지 못할 부끄러운 내용은 훨씬 더 많다 ㅠ ㅠ


명절이 다가온다. 또 씁쓸하다.


사진 : 헤라의 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