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어릴 때부터 굉장히 소심하고 꼼꼼한 아이였다. 공책 정리와 요점정리를 기막히게 잘해서, 내 공책을 시험 보기 전에 복사해서 보는 이들이 많았다. 교직에 있을 때 연수를 받는 중에도 그랬다. 그랬던 나였는데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으나, 바보 멍청이처럼 심한 덜렁이가 되어 나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까지 불편하게 만드는 일이 자주 생긴다. 그것도 사람에 따라 증세가 나타난다. 내 덜렁거림과 건망증을 이해해 줄 사람들 앞에서. 그래서 내 남편은 집 안에서뿐만 아니라, 외출 시에도 항상 마음의 준비를 하고 산다. 내가 생각해도 이해불가의 행동을 하고, 정신이 나간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엉뚱한 짓을 아주 자연스럽게 퉁퉁 저지르며 살기 때문이다. 그것도 기 하나 안 죽으며 당당하게 말이다.
주방에 있는 내게 물을 갖다 달라는 남편의 말에 난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 막내딸 방문을 열고 물을 갖다 준다. "나 아닌데?" 그 말에 신문을 읽고 있던 남편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가끔 내 차로 이동하자고 집을 나서면서도 차 키를 챙길 생각을 안 하는 나 대신 남편이 키를 챙기고, 물건을 잘 흘리고 다니는 아내 대신, 있던 장소를 떠날 때는 확인해야 할 몇 가지를 꼭 챙겨 묻는 남자! 난 그래서 더더욱 이 남자와 오래 살아야 한다. 가끔 서울에 올라갈 때는 전철을 이용하는데, 제대로 목적지까지 간 적이 반도 안 되는 것 같다. 보통 두세 번 갈아타는 코스에 한 번 정도는 거꾸로 타는 게 이상한 일도 아니다. 운전은 꽤 잘하는 편이지만(가끔 이상한 짓도 하지만) 왜 전철을 타면 바보가 되는지 난 그게 늘 이해가 안 된다.
그래도 내 기억 속의 덜렁이 챔피언은 교직에 있었을 때의 한 부장님이다. 학교 주차장에서 내리던 그 부장님의 모습을 생각하면 지금도 약간 기가 산다. '나 정도는 뭐!' 하면서. 내게 인사를 하며 내리시던 부장님은 멋진 정장에 멋진 핸드백(원래 멋쟁이다), 화장은 그날따라 왜 그리 잘 먹었는지, 그리고 집에서 신는 편안한 세 줄 슬리퍼! 내 미래의 모습이 절대 아니기를 이 순간 빌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