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채수아 Dec 08. 2023

시외 할머님과의 특별한 사랑

​결혼을 하고 나니, 새로운 인연이 참 많이도 생겼다. 남편과도 그렇지만, 어쩌면 그로 인해 맺어진 인연이 더 기막힌 게 아닌가 종종 생각할 때가 있다. 그중에서 나를 가장 많이 사랑해 주셨던 분이 바로 시외 할머님이시다. 할머님은, 내게는 좀 힘들 수 있는 '시어머님'의 친정어머님이신데, 충청도 웅천에 있는 본가에 사시다가


결혼 안 한 손주들을 몇 년 돌보시느라, 내가 살고 있던 수원에 올라와 계셨다. 내 걸음으로 10분도 안 되는 거리에 사셨는데, 손주며느리가 귀여우셨던지 우리 집에 자주 놀러 오셨다. 아니, 거의 매일 놀러 오셨다. 어찌 생각하면 부담스러울 수도 있는 분이었을 텐데, 난 그런 생각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그건 할머니의 전폭적인 사랑 덕분이었고, 그 사랑이 너무 지극하셔서 당신의 어머니와 사이가 별로 좋지 않은 우리 어머님이, 두 사람을 질투하시기까지 했다.


지금은 결혼 33년 넘었으니 어느 정도 음식을 뚝딱 쉽게 잘 해내는 편이지만, 그 당시 새댁이었던 나는 음식 하나를 제대로 못했다. 남편은 아내 사랑으로 맛있다 하며 먹어주었지만, 할머니 입맛에는 턱없이 부족했을 텐데도 항상 맛나다고 칭찬을 해 주시며 드셨다. 특히 잡채를 자주 해 드렸는데, 아주 맛있게 드셨고(내가 정말 맛있는 줄 알 정도로 ㅎㅎ) 그 이야기를 당신 자식들에게 과대포장하여 말씀하셔서 시댁 어른들께 '잡채'에 관한 칭찬을 황송할 정도로 많이 듣곤 했다. 또 한 가지 생각나는 일이 있다. 매달 월급을 타면 할머니께 조금씩 쓰실 돈을 드렸는데, 그날은 두어 번 거절하시는 게 아니라 심하게 내 손을 뿌리치셨다. 내가 많이 당황할 정도로 말이다.


"할머니, 왜 그러시는데요?"

하고 여쭈었더니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 방학인데, 월급도 못 타면서..."


나는 깔깔거리며 웃었다.


"할머니, 선생님은 방학을 해도 월급을 줘요."


"그러냐?"


지금도 나를 보고 환하게 웃으시던 할머니의 모습을 떠올리면 나는 금세 행복해진다. 그렇게 나와 몇 년을 자주 만나시다가 할머니는 충청도 시골로 내려가셨다. 큰 아들과 큰며느리가 있는 할머니의 집으로.


떨어져 있어도 늘 나를 사랑해 주는 그분의 존재로, '사랑은 저렇게 하는 걸 거야.' 하는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지금도 내 귀에 들리는 듯한 목소리 "지혜 에미야!" 이 아침에도 몹시 그리운 분이다. 내게 그리도 따뜻하셨던 할머니와 마지막으로 대화를 한 건, 할머니께서 돌아가시기 얼마 전의 여름방학이었다. 시댁 가족들 모두 시골에 내려가서 뵌 할머니는 너무나도 너무나도 작아져 있었다. 손목이 나의 반 정도나 될까? 사 가지고 내려간 고운 모시옷을 입어 본 할머니는 마치 허수아비 같아 마음이 아팠다. 밤이 되었다. 할머니 옆에서 손을 잡고 누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할머니는 갑자기 일어나셔서 이불장 이곳저곳에 손을 넣어보셨다. 그러시더니 꼬깃꼬깃한 봉투 하나를 내 손에 쥐어주셨다.


"애들 은수저 하나씩 해줘라."


난 순순히 할머니의 선물을 받았다. 그리고 목에 걸려있던 금목걸이를 빼서 할머니 목에 걸어드렸다. 다음날 아침 할머니의 목에 걸린 목걸이를 본 시댁 어른들께서, 그대로 두면 나중에(돌아가시고 나면) 처치 곤란하다고 말씀하셔서 다시 목걸이를 빼서 내 목에 걸었다. 할머니와의 마지막 시간들이 그렇게 끝나가고 있었다. 얼마 후에 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할머니의 마지막 모습은 "나 괜찮다. 잘 있어."라고 말씀하시듯 참 곱고 예쁘셨다


할머니가 주셨던 봉투가 생각난다. 얼마나 오래되었으면, 얼마나 만지작거렸으면 봉투가 닳고 닳아 가루가 묻어날 것 같았던, 모서리는 닳다 못해 작은 구멍이 나 있던 할머니의 봉투. 그 안에는 만 원짜리 다섯 장이 들어있었다. 누군가에게 받았는지, 아니면 따로 담아 놓으신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내게 주신 할머니의 마지막 선물이었다.



*10년 전 월간 샘터 10월 호에 실렸던 글을 수정해서 올렸습니다.



사진 : 네이버 이미지

매거진의 이전글 나는 가끔 무식해서 용감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