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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수아 Feb 02. 2024

기본에 충실한 삶

요즘 앨범 정리를 하고 있다. 아이들의 어린 시절 사진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이렇게 귀엽고 사랑스러웠구나, 그 당시의 내 마음까지 고스란히 느껴졌다. 세 아이의 엄마로 살아가는 내가 얼마나 축복받은 존재인지 새삼 깨닫게 되는 시간이다.  그러다가 문득, 두 개의 디카에 들어있는 사진들을 훑어보고 사진을 출력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진만 찍고 그대로 방치된 그 사진첩에는 귀한 사진들이 보물처럼 숨어 있었다. 그 한 장에 시선이 머물렀다. 친정 엄마의 모습이다. 가슴이 찡하고 눈물이 핑 돈다.


어르신들의 주선으로 선을  한 번 보고 아버지와 결혼하신 엄마, 서울에 있는 대학을 다닌다는 학생을 처음 보고 엄마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키가 자그마했지만, 잘 생긴 외모와 따스한 눈빛도 한몫을 했겠지만, 고학력이라는 것에 마음이 많이 끌렸을 것이다. 우리 엄마는 공부를 꽤 잘하셨지만, 중학교 시험에 낙방한 오라버니 때문에 덩달아 진학을 하지 못했다. 외할아버지는 두 번이나 낙방한 큰아들을 두고 바로 밑의 여동생을 도저히 중학교에 보낼 수 없다고 하셨단다. 그리고 엄마의 아래 남동생들은 모두 공부를 많이 시키셨다. 엄마는 공부에 대한 한이 가슴 깊이 있었다고 내게 말씀하셨다.


결혼을 하고 시댁에서 시어머님과 한 방을 쓰고 살다가, 아버지가 첫 발령을 받으신 후에 경기도 안성에 첫 보금자리를 만들었고, 엄마의 '여자의 일생'은 시작되었다. 교사의 아내로 살면서 엄마는 평생 부업을 하셨다. 지금은 교사의 월급이 그래도 많은 편이지만, 옛날에는 그야말로 쥐꼬리만 한 월급이었다고 한다. 엄마는 내가 태어나기 전, 나무를 내다 파는 일부터 하셨고, 내 기억 속의 엄마는 뜨개질, 눈썹 뜨기, 전기밥솥 팔기(10개를 팔면 1개의 이익을 남기는) 한복 짓기로 돈을 버셨다. 난 엄마가 아무 일고 하지 않고 있던 때를 기억하지 못한다. 엄마는 항상 뭔가를 하셨다.


바쁜 일상 속에서도 늘 가족의 밥을 제때 챙겨주셨고, 함께 살던 시댁 조카들에게도 자상한 작은 엄마였다.  언젠가 우리 집을 거쳐간 오빠들의 수를 헤아려보니, 내가 기억하는 오빠가 셋이고, 내가 태어나기 이전의 오빠가 둘, 도합 다섯 명의 조카가 우리 집을 거쳐갔다. 어릴 때는 당연한 것인 줄 알았지만, 내가 커서 결혼을 하고 보니 우리 엄마는 정말 대단한 일을 하고 사셨던 것이었다. 그러니 지금까지도 조카들의 방문을 받고, 엄마가 만들어 준 음식 맛을 잊지 못한다는 사촌 오빠의 말도 종종 듣는다.


그것뿐이랴!  아버지 제자들이 찾아오면 따순 밥을 먹이고, 구멍 난 양말을 꿰매주던 사모님이셨다. 제지들의 입을 통해서 들은, 또한 내 눈으로 본 우리 엄마는 따스하고 인정 많은 분이셨다. 책임감 강한 엄마는 아버지가 중풍으로 3년을 누워계실 때에도 지극정성으로 아버지를 돌보셨다. 당신이 건강을 잃으면 자식들이 힘들다 하시며, 매일 꾸준히 운동을 하셨고 식사도 잘 챙겨드셨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의 엄마가 점점 큰 사람으로 다가온다  큰 사람, 큰 사랑!


나는 복이 많아 기본에 충실한 부모님을 만났다. 그래서 아무런 걱정 없이 공부를 할 수 있었고, 살아가면서 지켜야 할 '기본'을 배웠다. 그것이 감사한 줄 몰랐다. 감사해야 하는 것일 줄 몰랐다.  부모가 기본을 지키기 않을 때 자녀들은 많이 아프고 힘들다. 교사가 제 역할을 하지 않을 때 학생들은 길을 잃는다. 조직의 리더가 중심이 잡혀있지 못할 때 많은 이들의 하루는 더 지치고 힘들어진다. 우리 모두가 제 위치를 알고 해야 할 일을 깨닫고, 그 일을 행하며 살았으면 좋겠다. 그러면 많은 사람들이 더 많이 웃을 테고, 덜 억울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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