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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수아 Apr 04. 2024

친구의 시어머님 (2017. 4. 4)

이상하게도 내 주변의 친구들은 맏며느리이거나 맏며느리 역할을 하는 친구들이 많았다. 맏이가 아니어도 아주버님이 외국에서 살고 계셔서 맏이 역할을 하는 친구들이 몇 명 있었다. 그래서 대화를 할 때 서로 공감하며 서로 위로해 주는 일이 많았다. 보통은 시어른을 몇 년 모시고 살다가 마음의 상처를 크게 입고 분가한 이후 잘 지내는 경우가 많고, 한 친구는 모시던 시할머님은 돌아가시고 지금은 홀로 되신 시아버님을 모시고 사는 친구가 있고, 모시던 시어머님이 잠시 재혼 비슷한 걸 하셨다가 다시 친구 집으로 들어오신 경우도 있다. 한국 여자들 몇이 모이면 시어른을 모시고 살고 있지 않더라도 늘 '시'자가 들어간 대화를 많이 한다는 건 누구나 다 알고 있을 것이다.


어제는 친구 하나가 카톡을 보냈다. 요즘 시어머님 병환으로 마음 아파하는 나를 위로하는 내용이었다. 그 친구는 홀로 삼 남매를 힘겹게 키우신 분의 맏며느리였는데, 나처럼 처음부터 시어머님을 모시고 살았다. 그분은 생활력이 강하시고 돈 버는 수단이 있으셨는지 서울에서 꽤 근사한 이층 집을 소유한 분이셨다. 여장부 성격이셨고 종교활동도 열심히 하시던 분이었다. 옆에서 보기에 기부와 봉사도 많이 하던 분이셨으나, 며느리에게만은 매우 혹독하셨다. 친구는 서울로 시집을 갔지만, 원래 다니고 있던 경기도의 초동학교에 출퇴근을 하고 있어 하루하루 진이 빠진 채로 살았지만, 학교를 바로 옮길 수 없는 시스템이었고, 무서운 시어머님에게서의 '분가'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내 친구는 아이 하나를 낳은 후에도 집에 돌아가, 온갖 집안 일과 아기가 먹은 젖병을 삶고 아기 옷을 빨았다. 자기 전까지 집안일을 해야 일을 끝낼 수 있었다. 그래도 잘 버텨나가다가 둘째 아이 유산을 연이어하는 상황이 생겼다  무서운 어머니께 순종만 하고 살았던 맏아들은 변화될 기미가 전혀 없는 이 상황에서 아내를 지키기 위해 어마님께 따귀까지 맞으며 분가를 결행했다.


몇 년 동안 두 사람의 월급을 다 바치고 살았건만, 나올 때는 집 얻을 돈을 못 주겠다고 하셨던 시어머님! 그래서 그 부부는 가족 셋이 겨우 잠을 잘 수 있는 월셋집을 구해 새 삶을 시작했다. 어머님과의 냉전 기간이 끝나고 한 10년 정도는 그래도 잘 지냈다. 그 이후 시어머님은 치매에 걸리셨고, 상태가 심해지셨을 때 친구 집 근처의 요양병원에 오래 계시다가 지난가을 돌아가셨다. 치매에도 종류가 다양하다고 하는데, 그 어머님은 쓰던 종이를 하나도 안 버리고 다 모아 놓으셨다. 그래서 어머님 침대 근처에서는 늘 '지린내'가 심하게 났다고 한다. 그리고 사 간 과일 등을 입원실 아무에게도 주지 않고 혼자만 드시고 남은 것은 서랍에 숨겨놓아서, 어머님을 뵈러 가는 날에는 숨겨 놓은 '지린내 나는 휴지'와 '썩은 과일'을 찾아서 버리는 게 일이었다고 한다.


지난가을, 시어머님이 돌아가신 후 마음이 몹시 힘들고 슬펐다는 친구가 내게 말했다. 잘 지낸 세월이 있어도, 시어른 모시고 살면서 아픔이 컸던 사람들은 돌아가신 후에 보통 사람들이 느끼지 못할 심적 고통이 클 수 있다고 했다. 그렇게 계속 어머님께 집중하고 정성을 다하고 있다가 돌아가시면, 그 허전함을 마음 여린 사람이 어떻게 견딜 수 있을지 걱정된다고도 했다.


아직도 돌아가신 시어머님의 "에미야!"소리가 그립다는 페북 언니의 댓글을, 며칠 전에 보고 눈물이 핑 돌았었다. 난 상상하지 않는다. 그러는 순간 흐르는 눈물을 멈추기 어려워서 난 어머님이 안 계신 이 세상을 상상하지 않는다. 그냥 하루하루를 어머님과 함께할 뿐이다.


※ 저희 시어머님은 그해 6월에 돌아가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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