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어머님이 계신 가족 납골묘에 시골에 계신 아버님을 모시고 올라올 예정이다. 4월 하순! 아버님이 돌아가신 지는 17년, 우리 막내가 아기였을 때이고, 우리가 지금 사는 이 집에 이사 오기 전이었다.
남편을 '그 화상, 그 웬수'라고 표현하셨던 우리 어머니, 그 당시는 어머님에 대한 짠한 마음보다는 장애를 가진 시아버님만 안쓰러웠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한 여인의 고단했던 삶'이 가슴으로 다가오며 난 뜨거운 눈물을 흘렸고, 가족을 먹여 살린 한 여인의 삶은 참으로 위대했다고 생각하며 어머니에 대한 내 사랑은 점점 깊어졌다.
"나 죽으면 자식들 가까이 있고 싶다. 시골 아버지도 화장해서 모시고 와."
말기 암 진단을 받기 보름 전, 큰아버님 장례식장에 다녀오며 우리 부부에게 하신 말씀이었다. 어머님과의 이별이 점차 다가올 시점에, 우리 부부는 아주버님 부부와 시누님께 어머님의 그 말씀을 전달해 가까운 곳에 가족 납골묘를 마련할 수 있었다.
사랑하는 남편이 아닌, 당신을 집안의 가장으로 만들어놓은, 한 많은 인생으로 몰아놓은 '웬수'라고 여기던 어머님의 긴 세월을 생각해서라도 어머님을 몇 년 동안이라도 혼자 계시게 하자(윤달 문제도 있으니 3년 뒤에 옮기자)는 시누님의 의견이 있었으나, 강력한 아주버님의 의견으로 이번에 아버님을 모시고 올라올 수 있게 된 것이다. 오랜 세월 나를 힘들게 하셨던 어머님이 나를 많이 아끼고 사랑하다 떠나셨듯이, 아버님에 대한 어머니의 마음도 다 녹여내시고 이 세상을 떠나셨다고 나는 믿는다.
나는 아버님 모실 준비를 하고 싶어서 어제 어머님께 다녀오자고 남편에게 말했다. 어머님이 좋아하시던 색깔의 화사한 꽃을 사서 어머님께 드리고 왔다. 바람에 날리고 색 바랜 꽃들은 다 정리해서 버렸다. 어머님 계신 곳을 깨끗이 닦아드리고, 어머님께 두런두런 이런 말씀을 드리고 왔다.
"어머니, 시골에서 아버님이 곧 올라오실 거예요. 이미 천국에서 잘 지내고 계시겠지만, 어머님과 아버님이 함께 이곳에 계시는 게 전 든든하고 좋아요. 어머니도 그러시죠? 어머님이 정성스럽게 키우신 우리 삼 남매는 너무나 훌륭하게 잘 자라서 자기의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어요.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있어요. 어머님이 장남처럼 의지하셨던 막내아들, 제가 더 많이 사랑해 주고 알콩달콩 잘 살겠습니다. 사랑해요, 어머니!"
돌아오는 길에 유명한 벚꽃길을 지나 집으로 돌아왔다. 감사한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