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어진 마음이 깨져버려 생긴 틈새

<남자 8편> 그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

by 오늘의간호사



금일 에피소드는 직전 글 <순진한 척, 나를 위한 척> 남자 시점 2편입니다.




“네가 처신 똑바로 했으면 이럴 일도 없었겠지.”


나는 벙이 찐다. 난 적어도 네 탓을 안 하려고 했는데, 어떻게 너는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내 탓을 해버리는 걸까. 울화통에 속이 무르고 아린 기분이다.



“그 동기한테 여자 얘기를 몇 번이나 듣는 거야? “


그리고 넌 작은 목소리로 ‘둘이 있을 때는 여자친구 없는 척을 도대체 얼마나 하는 거야?‘ 라며 읊조렸다.

손에서 땀이 나기 시작한다. 그 어떤 말로도 너의 화를 풀 수 없다는 생각, 자신이 없고 무섭다.


”지금 그 동기한테, 사실 여자친구가 있고 여자친구가 싫어하는 상황은 만들고 싶지 않다고 메시지 보내.“

너는 기어코 이 선을 넘는다.


결국 내 삶에 너무나도 가까워져버리려 하는 네게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스쳐 지나가 버렸다. 뭐가 그렇게 못 미더워서, 뭐가 그렇게 미워서, 너는 내가 다른 사람에게 하는 말까지 신경 쓰려할까-.


나는 알아서 해보겠다고, 박박 우겨보았다.

너는 무표정이다. 너의 감정선은 메말라 죽어 보이고, 너의 아우라는 검은색이다.

하지만 지금 내가 이 메시지를, 너의 오더를 받아들이고 행하는 순간 나는 내 삶이 없어질 것만 같다는 두려움이 더 강해서, 너의 감정보다 내 감정을 우선시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내가 “알아서 할게.”라는 말은 네게 귓등으로도 들리지 않는 모양이다. 곧 죽어도 보내라고 돌려 말한다. 평소 큼지막한 너의 목소리는 그 어떤 때보다도 차분하고 차갑다.


나는 동기와 주고받은 메시지 창을 켜 네게 내민다.

나는 내 나름의 떳떳함을 표하려고, 그러니까- 평소에 내가 동기랑 여자얘기를 별로 하지 않는다는 걸 어필하고 싶었다. 그래야만 이 불편한 대화가 흐지부지라도 마무리될 것만 같았다.



너는 조용히 내 휴대폰을 받아 들었다. 이불속 따뜻하게 누워있던 너의 체온이 지금 한 순간 급격히 내려앉아 스친 너의 손이 차게 식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너는 두 손으로 휴대폰을 보더니 뭔가 토독이는 것처럼 보였다. 아-, 뭐 하는 짓이지? 화나 치밀어 올라 거칠게 휴대폰을 뺏어 들었다.


‘사실 내가 여자친구가 있는데, 여자친구 싫어하는 건 하고 싶지 않아.‘라는 문장이 적혀있는 메시지 창. 너의 손은 직전까지 바빴던 것을 보면, 뭔가 할 말이 더 남아있는 것 같았다.


나는 메시지를 보내지 않은 채 휴대폰을 잠그고 천천히 고개를 들어 휴대폰에 멈춰있던 눈을 네게로 돌렸다.

“내가 그렇게 못 미더워?”

나의 눈에 힘이 들어가지 않음을 느낀다.


너는 역시나 ”어.“라고, 단 하나의 고민도 없이 답한다.

“못 미더우니까 이러는 거 아니야.” 그리고 못 미더워한다는 사실을 확인사살한다.


나는 내가 직접 보내겠다,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지금.”이라 말하는 너의 짧은 음성에 내가 왜, 왜 이래야 되지? 밀려오는 울화통에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어디서부터 우린 잘못된 걸까-.


차라리 동기가 소개해주려는 여자를 만나보고 싶다, 그녀는 다를까, 그녀와 만나보면.. 그거야 말로 자유를 얻은 기분일까?

아니. 이건 다른 사람과 사랑의 감정을 나누고 연애를 하고 싶다는 게 아니라, 단지 이 숨 막히는 관계를 잠시 잊고 싶다는 거다.




나는 휴대폰을 들어 키보드를 두들겼다. 너는 내 옆에서 표정이 한 껏 굳은 채, 뭐라고 치는지 보려고만 했다.

“알아서 할게. 진짜로.” 나도 굳어진 감정으로 곤두선 채 말했다.


하, 겉으로 내쉴 수 없는 짧은 한 숨을 수도 없이 쉬어낸다.

솔직히 말해서, 진짜로 동기에게 ‘난 여자친구가 있으니 네가 이러지 않았으면 한다.‘라는 말을 보내기엔 내가 똑바로 쳐냈는지 확신이 서지도 않는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내 공간에 자꾸만 너 자신으로 꽉 채우려는 것이 숨 막혀서, 조금은 여유를 내어놓고 싶다.


보낸 척, 넘어가야 해. 그래야 난 네가 주는 이 압박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아.

“보냈어?”

“응. 보냈어.” 나는 황급히 휴대폰을 내리며 말했다. 하지만 너의 표정은 쉽사리 풀리지 않았다.

“여자친구 있다고, 이러는 거 불편하다고 보냈어?“

“응.”

“전송 버튼 누른 거 맞아? 다시 한번 확인해 봐.”

“응. 보냈어-.” 나도 모르게 찌푸려지는 미간. 그냥 믿고 넘어가주면 안 될까.


너는 나를 쳐다본다. 나를 꿰뚫어 보는 시선에 내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이 느껴진다. 눈치 빠른 너는 나의 마음을 읽은 걸까.

”봐봐.“ 내 휴대폰으로 곧장 향하는 너의 손을 미처 뿌리치지 못하고, 그대로 내 휴대폰을 가져갔다.



아-, 망했다.


아무런 말도 없는 네가 내 휴대폰 화면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다.


“안 보냈잖아.” 네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나를 본다.


“.. 뭐야..?“ 너의 미간이 점점 위로 치솟는다. 상처와 이해할 수 없음을 한껏 표하는, 네 반응에 나는 할 말이 없다.


아, 넌 왜 남의 휴대폰을 맘대로 보는 걸까.

나 그런 거 진짜 싫은데-.


“미안해. 자존심도 상하고, 동기랑 불편해지기 싫었어.“

나는 고개를 떨구며 이야기했다. 네가 보이지 않는 시선 아래에서, 나는 짜증이 밀려오는 감정을 숨겨보며 몰래 미간을 움츠렸다.


“이해가 안되네. 왜 그렇게까지 거짓말을 쳐가면서 그 말을 못 보내는 건데?”

“.. 동기가 나중에 그거에 대해 물으면 숨기기도 어렵고..“

“... 나한텐 숨기기가 쉬워?“

“.. 아니, 미안해. 지금 보낼게.“


.. 결국 네가 원하는 대로 흘러간다.

끝까지 보내기 싫다는 생각이 머릿속과 마음속에 가득 찬다. 하지만, 현재로선 네게 질타를 더 받지 않으려면 보내는 수밖에 없다.


나는 못내 전송 버튼을 누르고, 네게 말없이 휴대폰 화면을 보여주었다.


네가 휴대폰을 확인하자마자 나는 휴대폰을 다시 내품으로 가져와 게임을 켰다.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해 얼른 이 상황을 무마시키고 싶다는 생각뿐이다.


“오늘, 안 나갈 거지?” 나는 휴대폰을 쳐다보며 네게 묻는다.

“......“ 대답이 없는 너를 슬쩍, 곁눈질로 확인하니 너는 말없이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다가 이내 돌아 누워 천장을 멀뚱히 바라본다. 턱에 힘을 주어 입을 앙 다무는 너는 지금 현재 상황이, 나의 대처가 맘에 안 드는 게 분명하다.


나를 믿지 못하는 네가 지나치게 눈치 빠르단 생각이 들어 지치고, 그 때문에 생기는 이런 불편한 기류에 숨이 막힌다.


하지만, 결국 내가 잘못한 건 맞지.

할 말은 해야 하고, 짚고 넘어가야 하는 똑똑한 너를 어떻게 원망하겠어.


근데, 나도. 나도 짜증 나는데 도리어 뭔가가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현실에-,

“나갈 거면 준비하고-.” 라며 너의 성질을 돋우며 나름의 반항을 한다.


너는 뒤 돌아 내게 등을 보여 누웠다.

“.. 하고 싶은 대로 해. 네가 쉬고 싶은 거 아냐?“

“그러자, 그럼.”







다음 날, 근무를 하며 동기를 마주쳤다.

동기 얼굴을 보니, 동기에겐 뭐라고 둘러댈지 마땅히 방안이 서지 않았다.


저녁이 되어 일을 마치고 나오는 길, 동기도 함께 채비를 하여 따라 나왔다.

“그래도 오늘은 일찍 끝났네.” 동기가 내게 말했다.

하, 들어가면 네가 날 기다리고 있겠지..? 이젠 그 사실이 그다지 즐겁지가 않다.


“그러게. 어제 잘 들어갔냐?”

“응, 잘 들어갔지. 근데 뭐냐, 너.”

“뭐가?”

“여자친구? 언제부터 만났었던 거야?“

아, 뭐라고 해야 할 지 모르겠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었더라-? 머리를 굴려본다.


“그때 처음에 친구 소개해준다고 했을 땐 없었지 않았나?“


선뜻 차마 아니라고, 그때도 만나는 사람이 있었다는 말을 하지 못한다.

“그때 통화도 하고 같이 한 잔 하자고 그랬어서, 나는 그 친구랑 있을 때 너한테 전화해도 되는 줄 알았지.”

뭘 해도 내가 이상한 것 같다.


“장난이야.”

“응?”

“여자친구가 싫어한다고 한 거-, 장난이라고. 있겠냐, 여자친구가. 그랬음 쓰레기지.”

나는 동기가 나의 거짓말을 믿게 하기 위해 일부로 더 세게 말한다.


동기가 나를 쳐다보며 의아해한다. 뭐가 되었든 불편한 사실을 깨닫기도 전에 오피스텔로 들어가는 문이 보이고, 하- 짧은 한숨과 함께 너를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한다. 이게 맞나, 너를 분명 사랑하는데. 도살장에 끌려가는 기분인 탓은 무엇일까-.


“그때는 너무 피곤해서, 피곤해서 그랬어. 나가기도 귀찮고..“

“나가기가 싫어서, 여자친구가 있다고 한 거라고?”

“응. 그러니까 다음에 만나게 되면 그전에 미리 얘기해줘.“

내게 쉴 틈이 필요해서 나는 거짓말에 힘을 싣는다. 너와 나의 적당한 거리를 유지시켜 너를 조금은 밀어내듯, 곁에 두게 할 수 있을 테니까.


“.. 음, 괜찮은 거 맞지?”


괜찮지도, 괜찮지 않지도 않은데. 그냥 너랑 나랑 둘만 알고 있으면 돼. 너도 그녀의 귀에 들어가지 않게 도와줄 거지? 우린 친구잖아-.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없는 생각을 하며 동기에게 애원의 눈 빛을 보낸다.



“.. 당연하지. 근데 네가 나 소개해주려고 하는 거, 주변 사람들은 모르지?“

“응. 당연하지.”

“그래. 앞으로도 비밀로 해줘, 잘 될지 안 될지 모르는 거니까. 나 간다. 연락해.“


나는 반항하는 기분에 약간의 짜릿함을 느낀다. 괜찮아. 너는 나를 사랑하니까, 늘 너는 나를 버리지 못해 왔으니까.

.. 근데, 동기는 내게 실망하면 나를 버릴 수도 있어서. 너도 내 인간관계에 있어서 다른 사람들과 사이가 틀어지는 건 싫잖아.




나는 가슴팍을 쓸어내리며, 억지로 라도 웃기로 한다. 네가, 내 웃는 모습을 봐야 오늘도 우린 무탈히 보낼 수 있을 테니까. 그렇게 나는 도어록 비밀번호를 누르며 너를 맞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