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10편> 이미 속고 있었다
해외에 온 지 어느덧 5일 차다. 무난하게 흘러가는 출장 스케쥴에 어느새 내 바이오리듬은 적응한 지 오래였다.
매일 고객들을 상대하고, 밤마다 회사 동료들과 피드백을 주고받다 보니 하루가 잘도 흘러갔다. 너는 근무시간에 바빠 연락이 잘 안 되는 것도 허다했지만 꽤나 익숙했던 일상이라 이해하기 힘들었던 건 아니었다.
‘오늘 야근할 것 같아‘
저녁에 온 연락으로 네가 오늘은 하루 종일 연락이 안 되겠구나, 싶다. 그래도 사고 칠 일은 없을 거라고. 그래야 한다고 굳게 믿어보려고 노력한다.
마지막으로 약속했잖아, 어려운 일은 아니잖아.
밤 열 시가 되고, 열한 시 언저리가 되어갈 때쯤에는 네가 일을 마무리 짓고 있겠지? 곧 연락이 오겠지? 싶다. 시차가 어느 정도 차이가 있다 보니 여긴 아직 저녁. 밤이라기엔 이른 시간이었다.
‘오늘 끝나고 한 잔 할 거 같아.‘
그래, 언젠가는 마주할 날이었다. 그냥 나는 상관없다. 다만 내가 경계하는 그 사람들과만 아니라고 해줘.
‘아, 그래. 누구랑?’
‘동기랑, 신입들.‘
내 마음이 철렁이다 못해 쿵- 하고 내려앉는다. 왜, 하필 너는 나와의 트러블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걸까.
‘.. 왜 하필 내가 먹지 말라는 사람들하고 가는 거야?‘
‘어차피 상관없잖아.‘
도대체 어떤 부분이 상관없다는 걸까. 걷잡을 수 없는 결론을, 너는 마주할 수 있어?
‘뭔 소리야. 그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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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답이 없었다.
다음날이 되어 너의 출근시간이 다가와도, 출근 시간이 지나도, 퇴근 시간이 지나도 답은 없었다.
우리가 연인 사이임을 아는 주변인이 없어 너의 행방을, 아니 너의 안위를 알아내려면 일을 크게 만들어야 했다.
뭐가 이상했으면 주변 사람들에게 연락이 왔을 거야. 경찰에 신고하는 건 괜한 일이 되는 걸 거야. 가슴을 쓰다듬으며 마음을 가다듬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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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네게서는 다음 날 내 업무가 시작되고 회의가 시간 되고 나서 까지도 감감무소식이었다.
그렇게 회사 동료들과 회의를 진행하는데, 동료들끼리 싸우기 시작했다. 1-2시간이면 끝나야 할 회의가 점점 길어진다. 지칠 때쯤, 결국 우리는 회의를 중단하고 20분간의 휴식시간을 갖기로 했다.
‘제발 연락해.‘
메시지를 한 통 보내고, 밤이 찾아왔다.
네게서 연락이 안 온 지 어느덧 24시간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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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결국 새벽 내내 스트레스받아 잠을 설쳤다. 호텔 방 불을 끄지 못난 채, 램수면에 헤롱 대며 간신히 눈이 떠질 때마다 휴대폰 알람내역을 확인했다.
그렇게 새벽 네시, 한국은 새벽 여섯 시다. 간신히 잠이 들렸는지 무거워진 눈꺼풀을 느리게 깜빡였다.
그때 메신저 어플의 전화 수신알람이 울렸다.
”... 너, 너 뭐야..? “ 화들짝 놀란 나는 헐레벌떡 수신버튼을 눌렀다.
‘흐아아- 어떡해-‘
전화를 받은 나의 음성 끝자락에, 너는 냅다 우는 소릴 내었다. 미안하단 사과 한 마디 없었다.
“.. 무, 뭐? “
‘휴, 휴대폰 잃어버렸어-.‘
“......”
‘그래서, 연락 못했어..’
”... 너, 곧 30살이잖아. 이럴 때야? “
‘.. 미안해.‘
“그리고 말도 안 되는 핑계 대지 마. 너 태블릿으로 충분히 연락할 수 있었어.”
‘.. 그걸 생각 못했어.‘
나는 한숨을 푹 쉬었다.
또, 핑계다. 지금 태블릿으로 연락 중이면서. 뭐 어떤 허튼짓을 하고 다니는 걸까.
‘솔직히 네가 화낼까 봐 무서워서 연락 못했어.’
기어코 너는 내 핑계를 댄다. 되지도 않는 가스라이팅에 내가 흔들릴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뭐 얼마나 당당하지 못한 행동들을 하고 다니길래 그런 핑계를 대? “
‘.......‘ 너는 할 말이 없나 보다.
“됐어. 집 들어왔으니까. 다음부터 그러지 마.”
네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거짓말인지 모르지만-,
뭐가 되었든 네가 내 뒤통수를 치는 일은, 결국 네가 너 무덤을 파는 일이 될 거야.
후회하는 일을 자처하는 사람의 폭주를 내가 어찌 돕겠어.
‘.. 응, 미안해.‘
“근데 너 출근은?”
‘아 휴가 받아서, 안 나가도 되었었어.‘
“아. 몰랐네. 말을 안 하니까. 나 진짜로 여기서 너 경찰에 신고해야 되나 고민했어.”
‘.. 에이, 뭘 그렇게까지 걱정했어.‘
“똑바로 해. 상대방 생각해 봐. 얼렁뚱땅 넘어가려 하지 말고.”
하, 자꾸만 치밀어 오르는 한숨을 참으려니 횡격막이 조여 오는 기분이다.
마음을 가다듬고, 두 시간가량 남은 내 취침시간을 취해보려 애쓴다.
아니, 솔직히 너의 발언에 기가 차고 화가 나서 이를 바득바득 갈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한국으로 귀국할 날이 다가왔다.
장난스레 네가 내게 잘못을 했으니, 공항으로 데리러 오라고 얘기했다.
‘.. 안 그래도 그러려고 했어.‘
근데, 전혀 죄책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아니, 단순히 뭐라도 수습하기 위함이지 이건 진짜 미안하고 보고 싶어서 오겠다는 게 아닌 것 같다.
뭐, 네가 오든 안 오든 내 마음은 어떨까. 나도 사실은, 오면 오는 거고, 말면.. 안 오면 그냥 마이너스일 뿐일 것 같다.
진짜 우리 관계는 썩은 동아줄이구나.
한숨을 내쉬며 비행기를 내렸다. 5시간이라는 짧지 않은 비행시간을 편하게 버티기 위해 편하게 입었는데, 오랜만에 보는데 너무 누추하나-? 이걸 생각하니 그냥 네가 안 오는 것도 나쁘지 않을 수 있겠다 싶다.
“나 비행기 내렸어. 어디야?”
“지금 거의 다 왔어.”
“.. 아, 아직이야? “
“.. 첫차 탄 거야.”
너는 한 껏 예민해져 있다. 왜, 나한테 짜증이지? 네가 잘못해서 오는 거잖아. 네가 차가 없어서 대중교통 타니까 더 피곤한 거잖아. 그렇다고 운전도 할 줄 몰라서 내 차를 대신 운전할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뭐가 잘났다고, 저러는지.
어이가 없지만, 뭐 해 뜬 피곤할 수 있지- 예민할 수 있지- 이해하기로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렇게 캐리어를 찾아 나올 때쯤에야 너를 더듬더듬 찾아야, 너를 마주할 수 있었다.
옆에 나를 따라 나오는 승객들과 회사 동료들에게 꾸벅 인사를 건넸다. 동료들은 슬쩍 장난으로 “어어-? 남자친구?”라고 했다. 넌 너만의 웃음을 억지로 지어 보이며 나의 동료들에게 목례했다. 어색할 때, 귀여워 보이고 싶을 때, 나를 꼬셨을 때 건네던 그 웃음이네. 매력적으로 보이고 싶었나 보다.
그리고 네가 고개를 돌릴 땐, 싸늘하게 표정이 식었다. 너와 내 사이엔 어색함뿐이다.
“.. 왜 그래? 기분 안 좋아?”
“... 아냐, 그냥 못 자서 그래.”
“.. 응. 와줘서 고마워. 버스 타러 가자.”
우리는 고속버스 안에서 아무 대화도 없었다. 분명 넌 자고 있지 않다.
분명, 그 30시간 안에 무슨 일이 벌어진 게 뻔하다.